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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전충효 세수인경의

사료적 기원과 전승 과정 연구

— 15세기 당대 사료와 후대 전승의 층위 구분을 중심으로 —

공개판(학술편) --- 16차 개정 원고 기준, Ⅷ장·부록 6 게재 보류

이춘화(건축사)

2026년 8월

가전충효 세수인경의

사료적 기원과 전승 과정 연구

--- 15세기 당대 사료와 후대 전승의 층위 구분을 중심으로 ---

이춘화(건축사)

2026년 8월

일러두기

본고는 공개 데이터베이스와 학술·향토 자료에 대한 문헌 조사를 바탕으로 작성한 연구 초고이다. 조선왕조실록의 관련 기사는 국사편찬위원회 데이터베이스로 확인하였고, 『승정원일기』는 경종 2년(1722) 7월 18일 기사의 원문을 직접 확보하여 분석하였다. 6차 개정에서는 『전의예안이씨천년사』(1999) 제6편 550~579면의 실물 지면을 확보하여, 「효정공 송천서원 행록」의 한문 전문과 국역(573~576면), 신도비문의 발췌(570면), 『경수집』 국역본(1990)의 간행사 전문(559~560면), 그리고 1999년 문중 공식 서술의 문면을 직접 확인·분석하였다. 7차 개정에서는 같은 책 제7편 문헌록 860~865면의 실물 지면과 제6편 572면의 재판독본을 추가로 확보하여, 신도비문의 한문 전문(860~861면)과 국역(861~864면), 「정대부인김씨묘표」(1445)의 원문·역문(860면), 「효정공휘정간유허비명」(864~865면), 그리고 572면 인용 문집의 서명(『농수집(聾叟集)』)을 직접 판독·분석하였다. 8차 개정은 새 실물 자료의 추가가 아니라 구성의 개정이다. 『전의예안이씨천년사』의 편찬 과정을 독립된 장(Ⅴ장)으로 분리하여 편찬 조직·집필 분담·인용 관계를 체계화하고, 여덟 자가 대표 가훈으로 정착해 간 과정을 다루는 수용사 장(Ⅵ장)을 신설하였으며, 편찬 관계자의 역할은 항목별로 확인/미확인을 구분하여 표로 정리하였다. 공공 조형물의 문면 등 새로 언급한 소수 항목은 언론 보도의 전재에 의거한 것으로 실사가 필요함을 본문에 명시하였다. 9차 개정에서는 『천년사』 권말 부속문의 실물 지면 — 1133면 「이책을 편찬하는데 도움을 주신 분들」(3파별 순위의 편찬 명단), 1134~1135면 「편집후기」(主筆 이태호, 1999. 6. 1), 그리고 판권지(초간 1999. 6. 1 인쇄·발행, 증보판 2002. 4. 30 발행) — 를 추가로 확보하여, 편찬 조직의 전체 명단과 편별 집필 귀속, 주필의 편집 원칙, 판본 이력에 관한 서술을 갱신하였다. 판권지로 증보판(2002)의 존재가 새로 확인되었으므로, 본고가 인용해 온 지면이 초간본과 증보판 중 어느 판본에 속하는지의 대조가 새 후속 과제로 추가된다. 10차 개정은 새 실물 자료의 추가가 아니라 방법론의 보강이다. 문헌학의 사본 계통 복원 방법(stemma codicum)을 서사 전승의 계통 복원에 원용하여, 문헌 간 인용 관계와 전승 요소의 최초 등장 지점을 계통도·대조표·연표로 복원하는 장(Ⅶ장)을 신설하였고, 그 안에 ’사료의 침묵’의 방법론적 지위를 별도 항으로 명시하였으며, 연구의 의의와 최종 원칙을 밝히는 장(ⅩⅢ장)을 결론 뒤에 두었다. 이에 따라 종전의 Ⅶ~Ⅺ장은 Ⅷ~Ⅻ장으로 이동하였다. 11차 개정에서는 사료의 전승·편찬 과정 분석을 넘어, 그 사료를 보존·운영해 온 조직 자체의 근현대 운영과 갈등 구조를 다루는 장(Ⅷ장 「근현대 문중 운영과 갈등 구조의 변화」)을 신설하였다. 이에 따라 종전의 Ⅷ~ⅩⅢ장은 Ⅸ~ⅩⅣ장으로 이동하였다. 신설 장은 특정 인물의 비판이나 옹호가 아니라 갈등의 형성·반복 구조의 분석을 목적으로 하며, 본고 전체의 표현 원칙('확인된다/전승된다/추정된다/현재까지 확인되지 않는다')을 동일하게 적용하고, 사료로 입증되지 않는 단정적 서술을 배제한다. 아울러 논문 말미에 열린 연구(Open Historical Research) 선언을 추가하여, 새로운 1차 사료가 확보될 때마다 분석과 결론이 수정·보완되는 연구임을 명시하였다. 12차 개정에서는 두 가지 자료가 추가되었다. 첫째, 전의이씨부정공파종문회 홈페이지 「족보 간행 내역」(www.jlbj.net, 2026. 7. 15 열람)의 족보 간행 연혁으로, 만력보·숭정보의 편찬 주체·판본 형태와 현전 상태(만력보 現無傳, 숭정보 현전 최고본·극희귀)가 새로 확인되었다. 이 자료는 문면상 경오대동보(1990) 권수 세적편 계통의 전재로 추정되나 원전 대조는 후속 과제이다. 둘째,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영조갑술보 실물로 판단되는 전의이씨족보 목활자본 10권 10책(청구기호 K2-1782, 이덕용 등 편, 1754)이 소장되어 있고 디지털장서각에서 원문이미지가 공개되어 있음이 확인되었다. 이에 따라 Ⅲ장의 만력보·숭정보·갑술보 절과 참고문헌을 갱신하고, 만력보 원본 탐색 과제를 갑술보 수권 전재 서발문 및 『청강집』 확인 경로로 재설정하였다. 장서각본 원문이미지와 본고 확보 전사본의 대조는 다음 개정의 과제로 남는다. 13차 개정에서는 Ⅷ장에 서술 층위 하나를 추가하였다. 근현대 운영사에 관하여 문서 사료가 부재한 영역에서 갈등 당사자·관계자의 구술 증언을 [당사자 증언]으로 등록하는 층위로, 증언은 그 자체로 사실 판정의 근거가 되지 못하며 반드시 독립된 1차 문서에 의한 검증을 거쳐야 [사실]로 이동한다. 아울러 본 연구의 저자가 제2기 갈등의 당사자임을 이해관계 명시(positionality statement)로 밝혔다. 저자의 증언 역시 다른 증언과 동일하게 검증 대상이며, 당사자성은 은폐가 아니라 명시로써 통제한다. 14차 개정에서는 「해명요구서」(2023)와 호소문(2023. 1. 11 작성, 2. 6 발송)·청원서의 원본 사진본, 그리고 『경원록』의 묘당호 제정 시말기가 확보됨에 따라, Ⅷ장 2절의 제1기 관련 증언 중 대립의 존재를 [사실]로 이동시키고, Ⅲ장 만력보 절에 발문 문면("首冠家訓尊世也")의 인용 증거를 추가하였으며, 1990년(경오보 서문 '친서')과 2022년(백년사 '어필')의 서술 마디를 확정하고, 물적 증거 검증의 일반 원칙을 Ⅷ장에 명시하였다. 15차 개정에서는 만력보 발문 전문(청원서 별지 <2>, 성보 전재본 사본)이 확보되어 쟁점 구절의 판독("首冠家訓尊世守也")과 가훈 조목의 저자 귀속("若家訓等條則持平所述云" --- 이제신), 공동 편찬 구조, 발문 연대(1575)가 확정되었고, 배제 독법에 대한 교감 판정을 Ⅲ장에 제시하였다. 아울러 수기 메모 「종사소고」의 "一石 熙昇" 표기로 화수회장 희승과 국어학자 이희승의 동일인 문제가 사실상 확정되었으며, 부록으로 인물별 문서 대장을 신설하였다. 16차 개정에서는 『전의인의 역사와 빛』(은와공종중, 2011)이 확보되어 12면의 이용호 격려사(2011)에 의해 여덟 자에 대한 입장 전환(2011 찬양 → 2023 금지 요구)의 존재가 [사실]로 확정되었다. 만력보 사진의 수록처는 『천년사』·『전의인의 역사와 빛』 모두 아님이 실물 대조로 확인되어 미상으로 정정하고 후보를 명시하였다(수록처 오인 표기의 자기 교정 이력은 본 일러두기에 남긴다). 최종 편집(Final Edition)에서는 내용·결론의 변경 없이 다음의 편집 정비만을 수행하였다: 동일 전거의 반복 각주 52건을 약식 재인용으로 정리, 본문 내 『승정원일기』 표기(겹낫표) 통일, 차례 신설, 오탈자·문장부호 교정. 연대기·계통도 표 안의 약식 전거 표기(겹낫표 생략)는 표 양식으로서 유지하였다. 다만 행록·신도비문·묘표는 『천년사』에 수록된 전사(轉寫)에 의한 확인이므로 서원 소장 원본 및 비석 실물·탁본과의 대조, 그리고 족보 판본(만력보·갑술보 등)의 원본 열람은 여전히 후속 과제로 남는다. 본문에서 그때마다 사료 등급과 확인 상태를 명시하였다.

서술의 층위는 다음 다섯 가지로 엄격히 구분한다. ① 확인되는 역사적 사실(당대 또는 그에 준하는 관찬 사료로 확인되는 것), ② 후대 기록(사건 이후 시점에 작성된 기록으로 작성 시점이 확인되는 것), ③ 문중 전승(문중 내에서 전해지나 작성 시점·전거가 불명확한 것), ④ 학계·공적 기관의 견해, ⑤ 현재까지 확인되지 않는 부분이다. 표현은 '확인된다', '전승된다', '추정된다', '현재까지 확인되지 않는다'로 한정하여 사용하였다. 아울러 문헌의 발생 층위는 ⑴ 15세기 당대 기록, ⑵ 후대 관찬 기록, ⑶ 족보 기록, ⑷ 문중·서원 전승 문헌, ⑸ 현대 편찬물의 다섯으로 구분하여 표기하며, 서로 다른 층위의 기록을 같은 평면에서 혼용하지 않는다.

초록

전의이씨(全義李氏)의 가훈 「가전충효 세수인경(家傳忠孝 世守仁敬)」 여덟 자의 사료적 기원과 전승 과정을 검토하였다. 15세기 당대에 준하는 관찬 사료인 『세종실록』에는 1432년(세종 14) 4월 25일 세종이 이정간(李貞幹, 1360~1439)을 자헌대부 중추원사로 특서하고 궤장(几杖)을 하사하며 효행을 포창하는 교서를 내린 사실이 확인된다.1 그러나 이 교서와 같은 해 5월 3일 이정간이 올린 사은 전문, 1439년(세종 21) 9월 27일의 이정간 졸기, 1445년(세종 27) 아들 이양간(李良幹)이 지은 「정대부인김씨묘표」, 그리고 1456년(세조 2)에 세워진 신도비 — 7차 개정에서 『전의예안이씨천년사』(1999) 제7편 수록 한문 전문(서·계보·명 전 범위)을 직접 판독하였다 — 어디에서도 여덟 자 어필의 하사는 현재까지 확인되지 않는다.2

현재까지 확인되는 자료의 범위에서, 여덟 자를 세종의 글씨로 귀속시킨 가장 이른 기록은 1574년(선조 7) 만력보(萬曆譜) 권수의 「삼조설(三條說)」로 보고된다(원본 대조 필요). 관찬 기록으로는 『승정원일기』 경종 2년(1722) 7월 18일 기사에 수록된 청주 유생들의 사액 청원 상소에서 "마침내 어필로 가전충효 세수인경 여덟 큰 글자를 써서 포창하였다(遂以御筆, 書家傳忠孝世守仁敬八大字, 以褒之)"는 진술이 확인되는데, 이는 '어필' 용어와 여덟 자 전문이 관찬 문서에 등장하는 현재까지 확인되는 최초의 사례이다.3 다만 그 성격은 국가의 독립적 확인이 아니라, "고을 사람들이 지금까지 아름답게 일컫는다(州人至今艶稱之)"고 스스로 밝힌 지역·유림 전승의 인용이다. 반면 조정이 주체가 된 유일한 관련 기사인 영조 49년(1773)의 후손 이징성 궤장 하사 기록은 어필을 언급하지 않아, 조정의 공식 서사가 궤장 중심이었음을 시사한다.4 한편 1754년(영조 30) 갑술보(甲戌譜) 중수 시 이징국(李徵國)의 발문은 '구보(舊譜) 권두에 여덟 자가 인행(印行)되어 있었으나 필적의 주인공에 대한 설명이 없었다'고 증언한다. 즉 여덟 자 자체의 족보 수록과 세종 귀속의 명문화는 시점이 다른 별개의 층위이다. 어필 이해는 갑술보 단계에서 송천서원 『서원행록』과 청강공의 수서(手書)를 전거로 문중 차원에서 공식화되었으나, 확보된 발문 한문 원문의 용어는 '어필'이 아니라 수서(手書)·특사(特賜)이며, '어필' 명명은 국역 단계의 보충으로 확인된다. 본 6차 개정에서는 발문이 인용한 『서원행록』의 한문 전문을 『천년사』 수록 전사로 직접 확보하여, 발문의 인용구 "世宗大王手書賜家傳忠孝世守仁敬八字"가 행록 문면에 그대로 존재함을 확인하였다(전거 사슬의 확증). 행록의 용어 역시 '어필'이 아닌 '수서(手書)'임이 직접 확인되었고, 행록이 실록 수록 교서의 고사(崔鄲·徐積, 唐宣宗·宋仁宗)를 정확히 반영하고 있어 작성자가 교서 문면을 인지하고 있었음이 드러났으며, 행록 자체가 경수시서의 간행(1509년 초간)을 언급하고 갑술보 발문(1754)에 인용되므로 그 성립은 1509~1754년 사이로 좁혀졌다. 이후 1937년 이극로(李克魯)의 확인과 언론 보도로 널리 알려졌다. 한편 '어제어필(御製御筆)'이라는 최상급 표현은 종전에 현대 문중 문서(2022년 이후) 단계의 부가로 파악하였으나, 6차 개정에서 『천년사』(1999) 본문이 이미 임종 문병·어제어필 서사를 싣고 있음이 확인되어 그 부가 시점이 늦어도 1999년, 나아가 『천년사』가 인용한 선행 문헌으로 소급될 가능성이 열렸다. 7차 개정에서는 572면 재판독으로 그 인용 문헌의 서명이 『농수집(聾叟集)』으로 확정되었으나, 이 서명의 문집은 공개 데이터베이스에서 현재까지 동정되지 않아 실물 확인이 최우선 후속 과제로 남는다.5 오늘날 국가가 이를 세종 어필로 공인한 바는 없으며, 학계·향토지 차원에서는 '세종 어필의 모각(模刻)·모사(模寫)로 추정된다'는 서술이 통용된다.6

8차 개정에서는 『천년사』(1999)의 편찬 과정을 독립된 장으로 분석하여, 간행사·머리말의 문면으로 확인되는 편찬 조직 — 간행위원장, 편집위원장, 파별 집필 분담, 심의, 발행인 겸 전문 감수 — 을 복원하고, 발행인과 집필자가 동일 개념이 아님을 사료로 명시하였다. 임종 문병설과 '어제어필'은 『천년사』 단계에서 비로소 확인되는 서술 요소이나, 인용 문헌 『농수집』의 동정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그 창안의 주체와 시점은 특정하지 않는다는 유보를 유지하였다. 아울러 여덟 자가 족보 권두·서원·관찬 등재·근대 보도·금석문·국역 간행물·공공 조형물·종합 씨족사·문중 게시 문서의 매체를 거치며 대표 가훈으로 정착해 간 수용사를 연대순으로 재구성하고, 현판·병풍·족자·의례 문서·교육자료 등 미조사 매체의 실사 과제를 설계하였다.

9차 개정에서는 『천년사』 권말 부속문(1133~1135면)과 판권지의 실물 지면을 확보하였다. 1133면의 편찬 명단으로 심의위원장(흥세)·총정리 및 편집(태호)·교정(태세)과 편별 집필 분담이 문면으로 확정되었고, 특히 제1편과 제6편 선부전서공파문중사의 집필자로 종관(鍾寬)이 명기되어 있음이 확인되어, 발행인·전문 감수자였던 이종관이 특정 편의 집필자로도 명단에 올라 있다는 사실이 추가되었다. 1134~1135면의 편집후기(主筆 이태호)는 집필 기간(1998. 11. 1~1999. 6. 1, 만 7개월)과 함께, 일부 종인이 자기 직조(直祖)의 사적을 과장 또는 허위로 미화시키려 한 것을 '역사는 왜곡할 수 없다'는 학자적 양심으로 삭제하였다는 편집 원칙을 명시하여, 최종 문면이 주필의 편집 판단을 거쳤음을 확인해 준다. 판권지로는 초간(1999. 6. 1)과 증보판(2002. 4. 30)의 판본 이력이 확정되었다. 임종설·'어제어필'이 실린 지면이 속한 부분의 집필 귀속은 명단상 대표집필 이태호·집필 이종관으로 좁혀졌으나, 두 사람 사이의 실제 분담과 해당 서술의 창안/전재 여부는 인용 문헌 『농수집』의 동정 전까지 특정하지 않는다는 유보를 유지한다.

본고의 결론은 특정 견해의 지지가 아니라 층위의 구분이다. (1) 세종의 특별한 포장(褒獎)과 궤장 하사는 사실로 확인된다. (2) 여덟 자의 세종 귀속은 현재까지 확인되는 범위에서 16세기 후반 이후의 기록에서 비로소 나타나며, 15세기 당대 사료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3) 이 두 층위를 혼동하지 않는 것이 이 가훈의 역사적 가치를 훼손하지 않으면서 사실에 충실하게 서술하는 길이다. 10차 개정에서는 이상의 검토를 사본 계통학(stemma codicum)의 방법으로 종합하여, 문헌 간 인용 관계와 전승 요소의 최초 등장 지점을 계통도와 대조표로 복원하는 장(Ⅶ장)을 신설하였다.

주제어: 가전충효 세수인경, 이정간, 세종 어필, 전의이씨, 만력보, 갑술보, 송천서원, 삼조설

차례

Ⅰ. 서론

Ⅱ. 선행연구 및 자료 현황 검토

Ⅲ. 사료 분석: 작성 시점 순의 검토

Ⅳ. 문헌 비교: 표현의 변천

Ⅴ. 근현대 전승과 『전의예안이씨천년사』 편찬 과정

Ⅵ. 「가전충효 세수인경」의 수용사 --- 대표 가훈으로의 정착 과정

Ⅶ. 「가전충효 세수인경」 전승계통도(Stemma Codicum)의 복원

Ⅷ. 근현대 문중 운영과 갈등 구조의 변화

Ⅸ. 연대기 정리

Ⅹ. 핵심 질문에 대한 검토 결과

Ⅺ. 전승 과정 분석

Ⅻ. 역사적 평가

ⅩⅢ. 결론

ⅩⅣ. 연구의 의의와 최종 원칙

참고문헌

부록

※ 면수는 조판 확정 후 기입한다.

Ⅰ. 서론

1. 연구 목적

「가전충효 세수인경」 여덟 자는 전의이씨(全義李氏)와 그 분관인 예안이씨(禮安李氏)의 대표 가훈으로 전승되고 있으며, 세종이 효자 이정간에게 내린 어필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널리 알려져 있다'는 것과 '사료로 확인된다'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본 연구의 목적은 이 여덟 자가 언제, 어떤 문헌에서 처음 등장하며, 세종의 어필이라는 이해가 언제부터 어떤 전거를 통해 형성되었는지를 사료의 작성 시점 순서에 따라 재구성하는 것이다. 어느 견해를 옹호하거나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확인 가능한 것과 확인되지 않는 것의 경계를 명확히 하는 것이 목표이다.

2. 연구 방법과 서술 원칙

첫째, 모든 기록을 '기록이 다루는 사건의 시점'이 아니라 '기록이 작성된 시점'을 기준으로 배열한다. 어필 하사가 사실이라면 그것은 1432년 전후의 일이겠으나, 그 사실 여부를 판정하는 근거는 각 기록의 작성 시점과 성격이다. 둘째, 사료를 등급화한다. 본고는 1급(당대 사초에 기반한 관찬 사료: 실록), 2급(사건과 근접한 시기의 금석문·시문집: 신도비, 경수집), 3급(작성 시점이 확인되는 족보 서발문: 삼조설, 갑술보 발문), 4급(작성 시점·전거가 불명확한 문중·서원 기록: 서원행록), 5급(근대 이후의 언론·향토지·개설서)으로 구분한다. 셋째, 추측을 배제하고 '확인된다/전승된다/추정된다/현재까지 확인되지 않는다'의 네 표현으로 판단을 한정한다. 넷째, 문헌의 발생 층위를 ⑴ 15세기 당대 기록, ⑵ 후대 관찬 기록, ⑶ 족보 기록, ⑷ 문중·서원 전승, ⑸ 현대 편찬물로 구분하고, 각 층위 사이의 인용·전거 관계를 명시한다. 다섯째, 인물의 역할에 관하여는 '만들었다·꾸며냈다·창작하였다·왜곡하였다'는 서술과 '아무 역할도 없었다'는 서술을 모두 배제하고, 직책·문면·서명 등 사료가 직접 입증하는 범위로만 서술한다(Ⅴ장 1절).

3. 연구의 한계

본고는 다음의 한계를 갖는다. 만력보(1574)·숭정보(1634)·갑술보(1754)의 원본 및 『서원행록』 원본을 직접 열람하지 못하였고, 해당 부분은 언론·향토지 등 2차 자료의 인용에 의존하였다. 『승정원일기』는 경종 2년(1722) 7월 18일 기사의 원문을 확보·분석하였으나, 그 상소에 대한 예조의 후속 처리 기사 등 전후 기사의 전수 검색은 완료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본고의 결론 중 족보·서원 문헌에 관한 부분은 원본 대조에 의해 수정될 수 있는 잠정적 결론이며, 이를 본문에 명시하였다. 이는 결함이라기보다 후속 검증 과제의 목록이기도 하다.

Ⅱ. 선행연구 및 자료 현황 검토

이 주제를 정면으로 다룬 학술 논문은 본 조사 범위에서 확인되지 않았다. 관련 서술은 크게 세 갈래에서 확인된다. 첫째,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디지털구로문화대전)의 「가전충효 세수인경」 항목은 유물(모사본) 해제의 형식으로 발견 경위와 필체 문제를 정리하고 있으며, '실제 세종의 글씨가 아니라 모사한 것으로 여겨진다'는 평가를 싣고 있다.7 둘째, 언론의 추적 보도(세종대왕신문, 2024)는 실록·신도비·족보 서발문을 대조하여 어필 귀속의 형성 과정을 정리하였는데, 만력보 삼조설과 갑술보 이징국 발문의 내용을 소개하고 있어 중요한 참고가 된다. 다만 언론 기사인 만큼 원문 인용의 정확성은 원본 대조로 재확인되어야 하며, 실제로 본고가 발문 한문 원문을 확보하여 대조한 결과 용어('어필' 부재)와 전거 구문(삼조설 '뒤의' 수서)에서 보도의 국역과 원문 사이에 차이가 확인되었다(Ⅲ장 3절 참조).8 셋째, 서지학 분야에서 천혜봉의 2005년 연구는 세종 친필로 추정되는 「세종대왕어사희우정효령대군방문」 서첩을 다루면서 필체 비교의 준거를 제공하였다.9

자료 현황을 보면, 『세종실록』은 국사편찬위원회 DB에서 원문·국역 모두 열람 가능하다. 전의이씨 족보는 1476년 성화초보(초보 형태, 원본 부전)10, 1574년 만력보, 1634년 숭정보11, 1754년 갑술보 및 이후의 개수보로 이어지는 판본 계보가 확인되며,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등에 후대 판본이 소장되어 있다.12 아울러 문중 종합 씨족사인 『전의예안이씨천년사』(1999)가 간행되어 있는데, 본 6차 개정에서 그 제6편(삼파 문중사, 선부전서공파) 550~579면의 실물 지면을 확보하여 「송천서원과 효정공 행록」(573~576면) 절의 행록 한문 전문·국역, 신도비문 발췌(570면), 『경수집』 국역본 간행사(559~560면), 그리고 1999년 문중 공식 서술의 문면을 직접 확인하였다.13 문헌록의 효정공 신도비명 전문(860면)과 유허비명(864면), 「조선가훈」(14면)은 남은 검증 경로이다. 송천서원은 이정간을 배향한 청주의 서원으로 1871년 훼철되었다가 1970년대에 복원되었는데, 『천년사』 573면은 숙종 21년 을해(1695) 창건·숙종 37년 신묘(1711) 사액으로 해제류의 서술을 확인해 준다(단 『천년사』의 서기 병기 '1696'은 을해년 환산의 오기로 보이며, 복원 연대도 『천년사』 1975년·해제류 1976년으로 1년의 차이가 있다).14 그러나 창건·사액 연대는 본고가 확인한 1722년 상소의 자술(丙戌間 창건·사액 미수)과 여전히 어긋나므로 잠정적으로 다룬다(Ⅲ장 2절 참조).15 『서원행록』의 서원 소장 원본의 현전 상태는 본 조사에서 확인되지 않았으나, 그 문면은 『천년사』 수록 전사로 확보되었다(Ⅲ장 4절 참조).

Ⅲ. 사료 분석: 작성 시점 순의 검토

1. 15세기 당대 사료 — 확인되는 역사적 사실

가. 『세종실록』 세종 14년(1432) 4월 25일 교서

『세종실록』에는 1432년(세종 14) 4월 25일, 세종이 이정간의 효행을 포창하여 자헌대부 중추원사(정2품)로 특별히 서용하고 궤장(几杖)을 하사하는 교서를 내린 사실이 확인된다.16 교서는 당나라 최단(崔鄲)과 송나라 서적(徐積)의 고사를 인용하며, 이정간의 나이가 이미 70세를 지났고 그 어머니가 90세를 넘었음에도 모자가 노래자(老萊子)의 고사처럼 즐거워한다는 취지를 담고 있다.17 이 기사는 여덟 자의 글씨나 어필 하사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이 기사에서 확인되는 사실은 (1) 특진(정2품 특서), (2) 궤장 하사, (3) 효행 포창 교서의 세 가지이며, 확인되지 않는 것은 어필 하사이다.

나. 『세종실록』 세종 14년 5월 3일 사은 전문

같은 해 5월 3일 이정간이 올린 사은 전문에는 거듭된 벼슬과 궤장·안석의 하사에 대한 감사가 실려 있으나, 어필에 대한 언급은 확인되지 않는다.18 신하가 임금의 친필을 받는 것은 극히 영광스러운 일로서 사은의 글에 언급되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점에서, 이 침묵은 주목할 만한 정황이다. 다만 '기록에 없다'는 것이 곧 '하사가 없었다'는 증명은 아니며, 이는 사료 비판에서 침묵 논증(argumentum ex silentio)의 한계로 남는다.

다. 『경수집(慶壽集)』 — 간행 이력의 확정과 하시(賀詩) 문면의 확인

당대 재상들이 이정간 모자의 경사를 노래한 시문을 엮은 『경수집』에는 유관(柳寬)의 시와 조말생(趙末生)의 서문이 실렸다고 전해 왔는데19, 그 간행 이력이 『천년사』 559~560면에 전재된 국역본(1990) 간행사에 의해 확정되었다.20 세종 9년(1427) 12월 19일 모부인 생신 경수연의 송시 29수와 세종 14년(1432) 영친연의 송시 57수를 이정간이 생전에 성권한 것이 원집이며, 중종 4년(1509) 현손 전평군 이계복(李繼福)이 초간하고, 숙종 8년(1682) 외손 정시성(鄭始成)과 방8대손 이만봉(李萬封)이 재간, 1918년 17대손 이학로(李學魯)·18대손 이능세(李能世) 등이 3간, 1990년 국역 4간하였다. 간행사는 세 차례의 간행 과정에서 "세종의 포서(褒書)와 공의 행장(行狀)을 앞뒤에 추록(追錄)하였으나", 초간 당시 이미 영연시 57수 중 40수가 일실되어 3간 시에 후손의 글로 일부를 보충하였다고 밝힌다. 즉 현전 『경수집』은 성립(1432 전후)과 초간(1509) 사이에 77년의 간격이 있고, 판본을 거치며 추록·보충이 이루어진 층위 복합적 문헌이므로, 그 수록 시문을 당대 사료로 쓸 때에는 판본 비판이 선행되어야 한다.

『천년사』 561~563면에 전재된 하시 — 권홍(權弘)·맹사성(孟思誠)· 황희(黃喜)·유관(柳寬)의 작품 — 의 문면을 확인한 결과, 교서(황희: "紫泥半濕花牋至", 임금의 인주가 반쯤 젖은 교서), 구장(鳩杖)·오석(烏石) 안석, 궁온(宮醞)과 주악 등 1432년의 은전들이 구체적으로 노래되고 있으나, 확인된 범위의 어느 하시에서도 여덟 자 글씨의 하사는 언급되지 않는다.21 이는 침묵 논증의 한계 안에서 읽어야 하고 하시 전체(86수 중 일실분 제외)의 확인이 필요하지만, 당대 명공거경들이 은전의 세목을 경쟁적으로 열거하는 축하시의 장르 관행에 비추어 주목할 만한 정황이다.

라. 신도비(1456) — 한문 전문의 확보와 여덟 자 부재의 확증

1456년(세조 2)에 세워진 이정간 신도비에 어필 하사의 내용이 없다는 점은 종전에 보도로만 전해졌고22, 6차 개정에서 『천년사』 570면 인용 발췌로 세종 포장 대목이 확인되었다.23 7차 개정에서는 『천년사』 제7편 문헌록 860~861면에 수록된 「효정공휘정간신도비명병서(孝靖公諱貞幹神道碑銘幷序)」의 한문 전문과 861~864면의 국역을 확보하여, 서(序)·계보 서술·명(銘)의 전 범위를 판독하였다.24 비문은 손자 이서장(李恕長, 전성군)이 경태 7년 병자(1456)에 지은 것으로, 세종 포장 대목의 문면은 570면 발췌와 일치한다.

早懸車, 退去于西原之松泉別墅, 左右親側, 怡怡愉愉, 弄雀雛供懽, 世謂 老萊之戲復覩于公云。世宗聞其孝純篤, 特降褒書, 超陞其官秩是上卿, 仍賜 几杖·酒樂以寵之。 (구두점 필자)

일찍 벼슬을 버리고 서원(西原, 현 청주)의 송천별서로 물러나 어버이 곁에서 즐겁고 유쾌하게 모시며 참새 새끼를 어르는 등으로 기쁘게 하니, 세상에서 노래자의 유희를 공에게서 다시 본다 하였다. 세종께서 그 효성이 순수하고 돈독함을 들으시고 특별히 포창하는 글(褒書)을 내리시고 그 관질을 뛰어올려 상경(上卿)으로 삼으셨으며, 이어 궤장과 주악을 내려 총애하셨다. (필자 번역)

전문 판독의 결과, 비문은 세종 포장 대목에서 포서(褒書, 교서)·초승(超陞)·궤장·주악을 들고, 이어 선덕 갑인(1434) 4월 2일 모부인을 정대부인으로 특가봉한 사실과 “그때 나이가 102세요 공의 나이 또한 80여 세였다(時年一百有二, 公年八十餘)”는 서술, 당시 현사대부들이 다투어 시가를 지었다는 서술로 나아가며, 말미의 명(銘) 역시 “주악과 궤장을 내리시니 만세에 영광이 드리우고 온 나라가 효를 일컬었다. 탁행을 높이 포창하여 길이 풍교를 도왔다(賜樂賜几, 萬世垂榮, 一國稱孝, 崇褒卓行, 永補風敎)”고 노래할 뿐이다. 서·계보·명의 전 범위 어디에도 여덟 자, 어필, 수서에 해당하는 언급이 없음이 확증되었다. 종전에 발췌 확인에 머물렀던 신도비의 침묵은 이로써 전문 차원의 확인으로 격상되었다. 어필 하사가 사실이라면 은전의 세목을 상세히 열거하는 이 비문이야말로 그것이 기록될 가장 자연스러운 자리라는 점에서, 이 침묵은 실록·사은 전문의 침묵과 정합하는 결정적 정황이다.

마. 「정대부인김씨묘표」(1445) — 15세기 사료의 추가

『천년사』 제7편 860면은 이정간의 모부인 낙안김씨의 묘표 원문과 역문을 수록한다.25 묘표는 정통 10년 을축(1445) 2월에 아들 내섬소윤 이양간(李良幹)이 지은 것으로, 부인이 지정 임오(1342)에 나서 정통 신유(1441) 12월 30일에 세상을 떠났다고 하고, “부인은 타고난 자질이 맑고 아름다우며 마음가짐이 깊고 진실하였다. 공(부군 이구직)이 먼저 세상을 떠나 과부로 50년을 사시는 동안 자손이 문에 가득하여 모두 진신(搢紳)이 되었으니, 예로써 가르치고 사랑으로 어루만져 가정의 규범이 세상의 흠모하는 바가 되었다”고 기린다. 즉 이 가문의 가범(家範)을 정면으로 칭송하는 1445년의 당대 문헌에서도 여덟 자나 어필에 대한 언급은 확인되지 않는다. 한편 『천년사』 국역자의 주기는 전서공 묘갈문(같은 이양간 찬)이 부인의 수한을 102세로, 이 묘표가 100세로 달리 적었음을 지적하고 생년 기준으로 100세가 옳다고 판단하였는데, 신도비(1456)의 “時年一百有二” 역시 이 수치 불일치의 계보 위에 있다.

바. 『세종실록』 세종 21년(1439) 9월 27일 졸기

이정간의 임종 국면에 대한 당대 관찬 기록은 『세종실록』 세종 21년 9월 27일의 졸기이다.26 졸기는 그가 병으로 졸하니 나이 80이었고, 부음이 알려지자 임금이 의례대로 조문·위로하고 시호를 효정(孝靖)이라 하였다고 전하며, 1432년의 특진·궤장·교서 포장을 회고한다. 임종 시의 친림 문병이나 여덟 자 하사에 관한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 이 기사는 뒤에서 볼 임종 하사설(Ⅲ장 6절)을 검증하는 당대 기준점이 된다.

사. 소결

15세기의 당대 및 근접 사료 — 실록 세 기사(1432년 교서·사은 전문, 1439년 졸기), 「정대부인김씨묘표」(1445), 신도비문 한문 전문(1456, 7차 개정에서 전 범위 판독), 그리고 확인된 범위의 경수집 하시 — 에서는 여덟 자 어필에 관한 기록이 현재까지 확인되지 않는다. 확인되는 것은 세종의 이례적 포장과 궤장 하사라는 사실 자체이다.

2. 『승정원일기』의 사료적 조건 — 구조적 공백

『승정원일기』는 세종대부터 작성된 것으로 파악되나, 임진왜란(1592)으로 선조 이전의 일기가, 이괄의 난(1624)으로 인조 초까지의 일기가 소실되었고, 1744년(영조 20) 승정원 화재로 임진왜란 이후~1721년(경종 1)의 일기가 다시 소실되어 1746년 일기청에서 조보(朝報)·등록(謄錄) 등을 토대로 개수하였다. 그 결과 현존 『승정원일기』는 1623년(인조 1) 이후분이며, 그중에서도 1722년(경종 2) 이후분이 화재를 면한 원본, 1623~1721년분은 후대 개수본이라는 층위 차이를 갖는다.27

이 소실사는 본 주제에 결정적 함의를 갖는다. 세종대의 『승정원일기』는 현존하지 않으므로, 어필 하사에 관한 당대 승정원일기 기록은 존재 여부 자체를 검증할 수 없고, 조선 후기 『승정원일기』에 나타나는 관련 기사는 구조적으로 후대 기록의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다. 아울러 1722년(경종 2)은 1744년 화재를 면한 원본 일기가 시작되는 구간이라는 점에서 사료적 층위가 상대적으로 안정된 시기이다.

가. 『승정원일기』 경종 2년(1722) 7월 18일 기사 — 관찬 기록상 '어필' 진술의 최초 확인

본 연구는 『승정원일기』 542책(탈초본 29책) 경종 2년 7월 18일 기사의 원문을 확인하였다. 이날 충청도 청주 유학 박수함(朴守諴) 등이 김사렴(金士廉)·최유경(崔有慶)·이정간·박광우(朴光佑)·이지충(李之沖)·조강(趙綱)·이대건(李大建) 7현 사우에 대한 사액과 이제신(李濟臣)·최석정(崔錫鼎)·이인혁(李寅爀)의 추배를 청하는 상소를 올렸고, 그 가운데 이정간 관련 대목은 다음과 같다.28

李貞幹, 自幼有至性, 其父早死, 事母極孝, 老而不衰, 嘗慕老萊子斑衣娛親之意, 爲嬰兒戲, 以悅母志, 世宗聞而嘉之, 擢拜中樞院使, 遂以御筆, 書家傳忠孝世守仁敬八大字, 以褒之。又令賜宴壽親, 州人至今艶稱之。

이정간은 어려서부터 지극한 성품이 있었다.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나자 어머니를 지극한 효성으로 섬겨 늙어서도 변함이 없었고, 일찍이 노래자(老萊子)가 색동옷으로 어버이를 즐겁게 한 뜻을 사모하여 어린아이 놀이를 하며 어머니의 마음을 기쁘게 하였다. 세종께서 이를 들으시고 가상히 여겨 중추원사에 발탁하시고, 마침내 어필(御筆)로 '가전충효 세수인경' 여덟 큰 글자를 써서 포창하셨다. 또 잔치를 내려 어머니의 장수를 축하하게 하시니, 고을 사람들이 지금까지 아름답게 일컫는다. (필자 번역)

이 기사에 대한 임금의 비답은 "상소를 살펴 잘 알았으니 상소의 내용은 묘당과 해당 관서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라"는 것이었고, 상소는 예조에 계하되었다.29

나. 이 기사의 사료적 성격 판정

첫째, 이 기사는 '어필(御筆)'이라는 용어와 여덟 자 전문이 관찬 문서에 등장하는, 현재까지 확인되는 최초의 사례이다. 이는 갑술보(1754)보다 32년 앞서며, 어필 전승이 늦어도 1722년에는 유림 차원의 공적 진술로 조정에 상달되었음을 확정해 준다. 둘째, 그러나 그 성격은 국가의 독립적 확인이 아니다. 이 대목은 사액을 청원하는 유생 상소의 일부로서, 상소 자체가 "고을 사람들이 지금까지 아름답게 일컫는다(州人至今艶稱之)"라고 하여 지역 전승임을 명시하고 있다. 즉 『승정원일기』의 이 기록은 기존 전승의 인용이 수록된 것이지, 어필 하사 사실에 대한 독립된 근거가 아니다. 비답 역시 상소 내용의 사실 여부를 확인한 것이 아니라 통상적인 품처 지시이다. 셋째, 문면상 주목되는 점은 이 상소의 이정간 서술에 실록이 확인해 주는 궤장 하사가 언급되지 않고 어필과 사연(賜宴)이 서사의 중심에 놓였다는 것이다. 당대 관찬 사료가 확인하는 사실(궤장·교서)과 후대 전승이 강조하는 요소(어필)가 자리를 바꾼 이 초점 이동은, 18세기 초 유림 사회에서 어필 전승이 이미 이정간 현창의 핵심 서사로 자리 잡았음을 보여 준다. 넷째, 이 상소는 만력보 「삼조설」의 작성자인 이제신의 추배를 함께 청하고 있어, 어필 전승을 담지한 문중·유림 네트워크의 연속성을 시사한다. 상소에서 이제신은 선조대에 이 고장(청주)에 수령으로 부임하여 베푼 선정("來莅是土, 多施仁惠")과 북병사로서의 무공으로 현창되며, 실제로 이듬해인 1723년(경종 3) 추배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고된다.30

다. 사우 연혁의 연대 불일치 — 원사료 우선 원칙의 적용

이 상소는 사우 창건을 "丙戌間"(1706년으로 추정)의 일로 자술하고, 1722년 시점에 "아직 사액을 받지 못하였다(尙未蒙恩額之頒)"고 명시한다. 이는 1695년(숙종 21) 창건·1711년 사액이라는 해제류의 서술과 정면으로 어긋난다.31 1차 사료(당사자들의 상소 자술)가 2차 해제와 충돌할 때에는 원사료를 우선하되, 해제의 전거(읍지·서원지 등)를 확인하여 불일치의 원인을 규명하는 것이 순서이다. 사액의 실제 시행 여부와 시점은 이 상소에 대한 예조의 후속 처리 기사를 승정원일기·실록에서 추적하여 확정할 후속 과제이다. 본고의 다른 서술에서 인용한 '1695년 창건·1711년 사액'은 이 불일치가 해소되기 전까지 잠정적인 것으로 취급한다.

라. 『승정원일기』 영조 49년(1773) 4월 3일 기사 — 후손 이징성에 대한 궤장 하사

검색 결과 확인된 두 번째 관련 기사이다. 이날 영조는 전 오위장 이징성(李徵聖)을 어필명(魚必溟)과 함께 불러 소견하고 궤장을 하사하였는데, 기사는 이징성을 "이정간의 10대손으로 무신년(1728)에 원종공신에도 들었으며 나이가 이제 여든셋인데 근력이 아직 강건하다"고 기록하고, 해조로 하여금 지중추부사 가설 단부(單付)로 임명하게 하였다.32 이 기사의 함의는 세 가지이다. 첫째, 세종이 이정간에게 궤장을 내린 지 341년 뒤 조정이 그 10대손을 다시 궤장으로 예우하면서 주서가 '이정간의 10대손'임을 명기한 것은, 이정간 고사가 18세기 후반 조정에서 여전히 인지되던 준거였음을 보여 준다. 둘째, 이때 소환된 기억의 내용은 궤장이지 어필이 아니다. 이 기사 어디에도 어필은 언급되지 않는다. 이는 침묵 논증의 한계 안에서 조심스럽게 읽어야 하지만, 적어도 조정 차원의 공식 서사가 실록이 확인하는 사실(궤장)을 중심으로 유지되었고, 어필은 유림·문중 전승의 층위에 머물러 있었다는 본고의 층위 구분과 정합적이다. 셋째, 이징성은 갑술보 발문의 저자 이징국(李徵國)과 같은 '징(徵)' 자 항렬로, 갑술보 편찬(1754) 세대와 동시대의 인물이다. 어필 전승의 문중 공식화(1754)와 조정의 궤장 중심 예우(1773)가 같은 세대에 병존하였다는 사실은, 두 층위가 서로 배타하지 않으면서도 구분되어 있었음을 보여 주는 흥미로운 병렬이다.

마. '李貞幹' 검색 결과의 전수 판별

승정원일기 DB에서 검색어 '李貞幹'으로 확인되는 기사는 총 6건이며, 판별 결과 본 주제와 관련되는 것은 위의 두 건(1722, 1773)뿐이다. 나머지는 이정간과 무관한 상소(1730), 이체자 동명이인 李貞榦이 포함된 유생 명단(1736년 2건), 동명이인이 포함된 명단(1782)이다.33 상세 판별표는 부록 5에 수록한다. 이로써 이 검색어에 관한 한 전수 검색이 완료되었고, '세종대 이후 『승정원일기』에서 이정간 관련 독립 기록은 확인되지 않으며, 확인되는 두 기사 중 어필을 언급하는 것은 유림 상소의 인용뿐'이라는 판단은 부재 증명이 아닌 전수 확인에 근거한 서술이 되었다. 다만 인명 검색만으로는 포착되지 않는 기사(사액 시행, 서원명·시호로만 지칭된 기사 등)가 있을 수 있으므로, '松泉', '賜額', '孝靖' 등 보조 검색어에 의한 추가 검색이 남은 과제이다.

3. 족보 판본의 계보와 기록의 층위

가. 성화초보(1476)

전의이씨 최초의 보첩으로는 1476년(성종 7) 이하(李賀)가 작성한 이른바 성화초보가 확인되나, 초보(草譜) 형태로 간행되지 않았고 원본이 전하지 않아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다.34 따라서 여덟 자의 수록 여부를 이 판본에서 확인하는 것은 현재로서는 불가능하다. 한편 문중 측의 정리에 따르면 성화보 이후 전의보와 예안보가 각 4차, 대동보가 4차 수보되었으며, 경오보는 9권 5,000여 면에 이른다고 하므로35, 판본 계보의 실사는 이 문중 측 기준 정보를 출발점으로 삼을 수 있다.

나. 만력보(1574)와 청강공의 수서 — 세종 귀속의 최초 확인 기록(잠정)

보도에 따르면, 여덟 자가 세종의 글씨로 소개된 가장 이른 기록은 1574년(선조 7) 이정간의 후손 이제신(李濟臣, 1536~1583, 일부 문헌 1584)이 만력보를 수보하면서 권수에 쓴 「삼조설(三條說)」로, 여기에 '세종대왕이 수서(手書)하셨다'는 취지의 기술이 있다고 한다.36 다만 본고가 확보한 갑술보 발문 한문 원문(후술)의 해당 구문은 "考淸江公述卷首三條說後所手書者", 즉 '청강공이 권수 삼조설을 지은 뒤에 손수 쓴 것을 상고하면'이므로, 발문이 전거로 삼은 것은 삼조설 본문이 아니라 삼조설 뒤에 부기된 청강공의 수서일 가능성이 크다.37 어느 독법이든 이것이 사실이라면 사건(1432)으로부터 약 142년 뒤의 기록이며, 작성 시점이 확인되는 문중 기록(3급)으로서 어필 귀속 전승의 최초 확인 지점이 된다. 다만 본고는 만력보 원본을 열람하지 못하였으므로, 이 서술은 원본 대조를 전제로 한 잠정적 확인이다. 만력보 원본 또는 그 전사본의 현전 여부·소장처 확인, 그리고 삼조설 본문과 그 후의 수서의 구분 확인이 본 연구의 최우선 후속 과제였다(12차 개정에서 아래와 같이 재설정).

12차 개정에서 문중 연혁 자료(전의이씨부정공파종문회 「족보 간행 내역」, 이하 '부정공파 연혁')에 의해 만력보의 편찬 정보가 보강되었다. 이에 따르면 만력보는 정숙공 탁(鐸), 그 아들 약포공 해수(海壽), 청강공 제신(濟臣)의 주관과 외손 안로(安璐)의 협력으로 이루어진 대사성공파·전서공파의 제1차 합보로, 『전의이씨성보』라 제하여 목판본 단권으로 간행되었으나 현무전(現無傳)이라 한다. 두 가지가 논문의 서술을 갱신한다. 첫째, 만력보 편찬은 이제신 단독이 아니라 3인 공동 주관의 사업이었다는 것이다. 둘째, 원본이 전하지 않는다는 문중 자체의 기록이 확인되었으므로, 원본 실물 탐색은 사실상 닫힌 경로이며, 검증은 다음의 우회 경로로 재설정된다: ⑴ 갑술보(1754) 수권에 전재된 만력구보서(이해수)·만력구보발(안로)의 문면 확인(장서각본 원문이미지로 가능, 후술), ⑵ 이제신의 문집 『청강집(淸江集)』에 삼조설 또는 상응하는 글이 수록되어 있는지의 확인, ⑶ 갑술보 수권의 「청강공여안로서(淸江公與安璐書)」·「청강공자손보서략」 부근에 삼조설 관련 문면이 있는지의 확인이다. 한편 연대에 미세한 불일치가 있다. 부정공파 연혁은 만력보를 선조 갑술(1574)년의 간행이라 하나, 장서각본 갑술보 수권의 구보 서발은 만력 을해(1575, 이해수 서)·만력 3년(1575, 안로 발)으로 해제에 기재되어 있다. 편찬 1574년·서발 및 간행 1575년으로 정합시킬 수 있으나, 원문 확인 전까지는 두 연대를 병기하고 판정을 유보한다.

14차 개정에서 만력보 관련 문면이 하나 추가되었다. 이종관이 이용호에게 발송한 「해명요구서」(2023, 사본 14면 --- 상세 분석은 전체판 Ⅷ장 2절, 공개판에서는 게재 보류)의 별지에 만력보 발문의 한문 구절이 다음과 같이 인용되어 있다: "一帙凡撰 次皆禀裁于相公 首冠家訓尊世守也 只錄子姓重宗緖也". 이 가운데 "首冠家訓尊世也"(권두에 가훈을 얹었다는 취지 --- 같은 문서 13면에는 "首冠家訓 專世守也"로도 판독되어 있어 尊/專의 자형 판독이 갈린다)는 만력보 권수에 가훈이 실려 있었다는 발문 자체의 증언으로, 갑술보(1754) 발문의 '구보 권두 인행' 증언과 독립적으로 부합한다. 같은 문서에 따르면 만력보 복사본이 고(故) 기종(基宗)에 의해 전해진 사실이 있으나 판독이 곤란하며, 이용호는 그 복사본에 가훈이 등재되어 있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이종관은 발문 문면을 들어 등재 사실을 주장한다. 즉 만력보 권수의 가훈 등재 여부 자체가 문중 내부에서 다투어지는 쟁점임이 문서로 확인되었다. 본고의 판정: 발문 문면은 등재를 지지하는 방향의 문헌 증거이나 인용의 인용 단계이므로, 기종 전래 복사본·청원서 별지 사본·장서각본 갑술보 수권 전재분의 삼자 대조로 원문 확정이 필요하다. 尊/專 판독 문제도 같은 대조로 해결된다.

15차 개정에서 위 과제가 대부분 해결되었다. 이용호의 청원서 별지 <2>가 사진본으로 확보되었는데, 이는 만력보 발문(「萬曆譜跋」)의 전문을 『전의·예안이씨성보』 제1권(후대 성보의 수권 전재본)에서 복사한 것이다. 발문 전문의 확보로 다음이 확정된다. ⑴ 판독의 확정: 쟁점 구절의 원문은 "凡撰次皆禀裁于相公 首冠家訓尊世守也 只錄子姓重宗緖也"로, 尊/專의 판독 이문은 尊으로 종결된다. 문리는 "무릇 편찬과 차례 매김(撰次)은 모두 상공(정숙공 탁)께 품의하여 재가받았으니, 첫머리에 가훈을 얹은 것은 세수(世守)를 높인 것이요, 자성만 수록한 것은 종서(宗緖)를 중히 여긴 것이다"이다. 世守의 두 글자가 발문에 직접 등장하는 점은 여덟 자 후반부(世守仁敬)와의 문면상 연관에서 주목된다. 다만 엄밀히 구분하면, 발문이 직접 확정하는 것은 가훈의 권두 등재와 그 저자이며, 그 가훈의 문면이 현행 여덟 자(家傳忠孝 世守仁敬)와 동일하였는지는 발문에 가훈 본문의 인용이 없으므로 직접 확정되지 않는다. 여덟 자였을 개연성은 갑술보(1754) 발문의 "구보 권두 여덟 자" 증언, 서원행록의 "八字" 문면, 그리고 본 발문의 世守 용어와의 정합에 의해 높게 평가되나, 만력보 권두 실물(또는 그 사진)의 확인 전까지 이 동일성 명제는 [추정] 층위를 유지한다. ⑵ 저자 귀속의 확정: 발문 말미의 "若家訓等條則持平所述云"(가훈 등의 조목은 지평이 지은 바라 한다)은 가훈 조목의 저자를 지평 --- 발문 서두에 "持平濟臣"으로 명기된 이제신 --- 으로 지목한다. 이는 갑술보(1754) 발문이 전거로 삼은 "淸江公述卷首三條說"과 179년의 간격을 두고 정확히 정합하며, 만력보 권수 가훈 조목의 존재와 그 저자(이제신)가 발문 자체의 증언으로 확립된다. ⑶ 편찬 구조의 확정: "余以太師彌孫辱承領相公隆委 與子姓持平濟臣幼學文琦 叅證諸譜 彙爲一帙"에 의해 정숙공 탁(領相公)의 위촉 아래 이제신(지평)·이문기(유학)가 참증하고 외손 안로가 발문한 공동 편찬 구조가 원문으로 확인되어, 부정공파 연혁의 기술과 부합한다. 발문의 서명은 "萬曆三年三月下澣 十七代彌孫 順興 安璐 謹跋"(1575년 3월 하한)로, 편찬 1574년·발문 1575년의 연대 정합도 확정된다.

이로써 이용호의 국역 --- "수관가훈은 세세조상 숭배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에 모두다 상공에게 품재 받아 편찬에서 물리쳤다" --- 에 대한 문법적 검토가 가능해졌다. 본고의 판정은 다음과 같다. 첫째, 撰次는 '편찬하고 차례 매기다'의 관용 복합어로, 次를 독립 동사('나아가지 못하다·머뭇거리다')로 떼어 읽는 독법은 "凡撰次皆禀裁于相公"의 통사와 맞지 않는다. 둘째, "首冠家訓尊世守也 / 只錄子姓重宗緖也"는 [행위]+[취지]也의 완전한 대구로, 후구를 '기록하였다'로 옮기면서 전구만 '물리쳤다'로 옮기는 것은 대구 구조를 깨뜨린다(이용호 자신의 국역도 후구는 수록으로 옮긴다). 셋째, 가훈이 편찬에서 배제되었다면 발문이 굳이 "若家訓等條則持平所述云"이라 하여 가훈 조목의 저자를 밝힐 이유가 없다 --- 이 구절은 가훈 조목의 수록을 전제한다. 따라서 만력보 권수의 가훈 등재는 발문 문면상 지지되며, 배제 독법은 성립하기 어렵다. 다만 본 별지 사본 자체가 후대 성보의 전재본이므로, 전재의 충실성 확인(장서각본 갑술보 수권 전재분과의 대조)은 여전히 최종 확정 절차로 남는다. 아울러 만력보 실물의 사진(기종 제공 복사본의 서문 첫장, "전의이씨 최초의 인쇄된 족보" 설명 부기)이 어느 간행물의 43면("제1편 고려시대" 체재)에서 복사된 것인지는 현재까지 확인되지 않는다. 『전의예안이씨천년사』와 『전의인의 역사와 빛』(2011)이 아님은 실물 대조로 확인되었고, 남은 후보는 『전의이씨천년고』(대사성공파종회 간행으로 전하는 책) 및 『전의·예안이씨화수회 백년사』(2022) 등이다. 수록처가 확정되면 해당 면의 고해상도 재판독이 서문 문면 확인의 경로가 된다.

다. 숭정보(1634)

1634년 간행된 숭정보의 존재가 확인되나38, 여덟 자의 수록 양상과 관련 서발문의 유무는 본 조사에서 확인되지 않았다. 만력보와 갑술보 사이의 전승 연속성을 검증할 수 있는 판본이므로 원본 확인이 필요하다.

부정공파 연혁은 숭정보에 관하여 다음을 전한다. 치재공 구준(耉俊)·잠와공 명준(命俊) 형제와 영천군수 후기(厚基)의 주관으로 이루어진 대사성공파·전서공파의 제2차 합보로, 『전의이씨성보』라 제하여 목판본 전 2권으로 간행되었으며, 이후기의 발문에 따르면 원고 완성 6년 뒤 그가 영천군수로 부임하고 그 이듬해인 인조 갑술년(1634)에 판각·간행되었다고 한다. 특히 이 자료는 숭정보를 '현전 최고본(最古本)으로 극히 희귀'하다고 기술한다. 즉 만력보와 달리 숭정보는 실물이 어딘가에 현전한다는 문중 기록이 확인된 것이며, 이로써 숭정보 실물의 소재 확인이 판본 실사의 최우선 과제로 격상된다. 탐문 경로는 장서각·규장각·국립중앙도서관 등 고문헌 소장 기관의 목록 검색, 이후기의 재임지(영천) 연고 기관, 그리고 문중 각 파종회 보관 고보의 순이다. 확인할 사항은 두 가지다: 권두에 여덟 자가 인행되어 있는지(갑술보 발문의 '구보' 판별), 그리고 서발문에 여덟 자·수서·세종 관련 언급이 있는지(만력보와 갑술보 사이 180년의 전승 연속성).

라. 갑술보(1754)와 이징국 발문 — 원문의 확보와 정밀 독해

1754년(영조 30) 갑술보 중수 시 이징국(李徵國)이 쓴 발문은 이 문제의 가장 중요한 내부 증언이다. 본고는 문중 전사본에 의해 발문의 한문 원문을 확보하였다. 아울러 12차 개정에서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영조갑술보 실물로 판단되는 판본 --- 『전의이씨족보』 목활자본 10권 10책, 청구기호 K2-1782, 이덕용(李德容) 등 편, 무주 적상산사고 구장 조선총독부 기증본 --- 이 소장되어 있고 디지털장서각에서 원문이미지 전 10책이 공개되어 있음이 확인되었다. 편자 이덕용은 부정공파 연혁이 전하는 갑술보 주관자(징국과 그 아들 현감공 덕용)와 일치하므로 판본 동정은 문중 기록으로 교차 확인된다. 다만 활자에 관하여 부정공파 연혁은 금속활자본 총 10권이라 하고 장서각 서지는 목활자본이라 하여 어긋나므로, 이 점은 실물 서지 조사로 판정될 사항으로 병기해 둔다. 장서각 해제에 따르면 이 판본의 각 책 제1면(제1책은 제4면)에 '家傳忠孝世守仁敬' 여덟 자가 날인되어 있고, 수권에는 만력·숭정 구보의 서발문과 「효정공송천서원행록」·「청강공여안로서」 등이 전재되어 있어, 본고가 후속 과제로 남긴 발문 실물 대조·권두 인행본 실사·행록 문면 확인이 모두 이 한 판본의 원문이미지로 수행 가능하다. 본 절의 원문 대조는 장서각본 이미지와의 대조가 완료되는 대로 갱신한다(현 단계 표기는 전사본 기준을 유지한다).39 교감을 거친 원문과 필자 번역은 다음과 같다(교감·역주 사항은 각주 참조).40

右家傳忠孝世守仁敬八字, 刊行於舊譜卷首, 曾不標書其筆蹟之所自來矣。今番譜牒重修時, 得見孝靖公松泉書院行錄, 則有世宗大王手書賜家傳忠孝世守仁敬八字之語, 乃知此八字是孝靖公之得受於聖朝, 以忠孝仁敬爲家傳世守之訓也。且考淸江公述卷首三條說後所手書者, 則尤可知其爲世廟之有特賜也。依舊本重模, 印揭于譜牒首張, 以爲同譜人開卷即見, 世世遵奉服膺之地。英祖甲戌修譜時徵國所述。

위의 가전충효 세수인경 여덟 자는 구보 권수에 인행되어 왔으나, 일찍이 그 필적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 밝혀 적지 않았다. 이번 보첩 중수 때 효정공의 송천서원 행록을 얻어 보니 '세종대왕께서 가전충효 세수인경 여덟 자를 손수 써서(手書) 하사하셨다'는 말이 있어, 비로소 이 여덟 자가 효정공께서 성조(聖朝)로부터 받으신, 충효와 인경을 가문에 전하고 대대로 지키라는 가르침임을 알았다. 또 청강공이 권수 삼조설을 지은 뒤에 손수 쓴 것을 상고하면, 그것이 세묘(世廟, 문맥상 세종)께서 특별히 하사(特賜)하신 것임을 더욱 알 수 있다. 구본대로 다시 모사하여 보첩 첫 장에 인행·게시하니, 같은 족보를 보는 이들이 책을 펴면 곧 보아 대대로 준봉하고 마음에 새기는 바탕으로 삼고자 한다. 영조 갑술 수보 시 징국이 지음. (필자 번역)

이 발문에서 세 가지 층위가 분리된다. 첫째, 여덟 자 자체는 갑술보 이전의 '구보' 권두에 이미 인행되어 있었다는 것(曾不標書其筆蹟之所自來 — 필적의 유래 표기 없이). 둘째, 세종 귀속은 행록과 청강공의 수서라는 별도 문헌을 전거로 갑술보 단계에서 판단·명문화되었다는 것. 셋째, 권두 게시본은 구본의 모사(重模)임을 발문 스스로 명시한다는 것이다. 즉 1754년의 편찬자 스스로가 '여덟 자의 존재'와 '세종 귀속'이 별개의 전거를 갖는다는 점, 그리고 게시본이 진본이 아닌 모사임을 증언하고 있는 셈이다. 여기서 '구보'가 만력보인지, 숭정보인지, 혹은 그 이전의 판본인지는 현재까지 확인되지 않는다.

원문 확보로 새로 확인된 사실이 둘 있다. 첫째, 발문 원문에는 '어필(御筆)'이라는 단어가 없다. 행록 인용은 '手書賜', 청강공의 것은 '手書', 세종의 행위는 '特賜'로 표현되며, 문중 국역본과 언론 인용에 보이는 "어필임을 알 수 있다"의 '어필'은 번역 단계의 보충이다. 따라서 원문이 확인되는 범위에서 '御筆'이라는 용어의 전근대 용례는 1722년 승정원일기 상소가 유일하며, 갑술보 발문의 용어 층위는 수서·특사에 머문다. 둘째, 『서원행록』의 해당 문면이 발문의 인용을 매개로 처음 구체적으로 확인되었다. 발문이 전하는 행록의 구절은 "世宗大王手書賜家傳忠孝世守仁敬八字"로, 행록 역시 '어필'이 아닌 '手書'를 쓰고 있었음이 간접 확인된다. 물론 이는 발문을 통한 간접 확인이므로 행록 원문 실사를 대체하지 못한다.

4. 송천서원과 『서원행록』 — 행록 한문 전문의 확보와 전거 사슬의 확증

가. 서원의 연혁과 배향 인물

송천서원은 청주에 세워져 김사렴·최유경·이정간 등 7인을 배향한 서원이다. 『천년사』 573면에 따르면 숙종 21년 을해(1695, 지면의 서기 병기 '1696'은 환산 오기로 판단)에 유림에 의하여 창건되고 숙종 37년 신묘(1711)에 사액되었으며, 원래 청원군 옥산면 환희리 송천마을에 있던 것이 고종 때 훼철된 뒤 1975년(해제류는 1976년) 지방 유림과 후손에 의하여 행정(杏亭) 서편의 효정공 송천별서 구지(舊址)로 옮겨 복원되었다.41 이로써 창건·사액 연대에 관한 문중 공식 서술은 해제류42와 일치함이 확인되었으나, 1722년 상소의 자술(丙戌間 창건, 1722년 현재 사액 미수)43과의 불일치는 오히려 더 선명해졌으며 그 해소는 여전히 후속 과제이다. 한편 『천년사』 574~575면의 배향 15현 목록에는 1722년 상소가 추배를 청한 이제신·최석정·이인혁 세 사람이 모두 포함되어 있고, 나아가 남구만(1656년 급제)·박문수(1723년 급제)·이종성(1747년 급제) 등 후대의 인물들도 배향되어 있어, 추배 청원이 결국 관철되었고 배향이 18세기 중반 이후까지 확대되었음을 시사한다(각 추배의 시점은 미확인).44 같은 목록의 이정간 항목이 "가전충효(家傳忠孝), 세수인경(世守仁敬), 팔자어필(八字御筆)이 하사되었다"고 서술하는 것은 1999년 시점 문중 공식 서술의 용어 층위를 보여 준다.45

나. 행록 한문 전문의 확보

『천년사』 575~576면은 「효정공송천서원행록(孝靖公松泉書院行錄)」이라는 표제 아래 행록의 한문 전문과 국역을 수록하고 있다. 이로써 종전에 갑술보 발문(1754)의 인용과 1937년 이극로의 확인 경위를 통해서만 간접 확인되던 행록의 문면이46 직접 확인되었다(단 『천년사』 수록 전사본에 의한 확인이며, 서원 소장 원본과의 대조는 남은 과제이다). 핵심 대목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전사상의 판독 문제와 교감 사항은 각주 참조).47

公諱貞幹, 字固夫, 系出全城, 太師公十一代孫也。早陞柏府, 歷躡天官, 出而都觀察使, 晚承宸獎, 擢至中樞院使。公天性醇謹, 行佩百源。不幸早孤, 事母至孝, 行年八十, 常爲老萊之舞·嬰兒之戲, 以娛百歲之親, 又常設慶壽宴 以爲樂。事順之行, 登聞于天, 世宗大王手書賜家傳忠孝世守仁敬八字, 繼有褒美之典敎, 引崔郾[鄲]·徐積之美行, 追唐宣·宋仁之寵獎。旣有崇班 几杖之賜, 又有中宮酒樂之命, 榮光耀世, 世人觀感, 猗歟休哉。時名公鉅卿 咸集賓筵, 權弘·孟思誠·黃喜·河演·卞季良·鄭麟趾諸賢, 序以贊其德, 詩以詠 其美, 有慶壽詩序一帙, 刊行于世。欲知公誠孝之出天, 可以考信於一部詩序 矣。(중략) 公之胤靈巖公士惠, 娶按廉使金先生士廉之孫女, 居淸州梧根村, 有銀杏樹可蔭[菱], 公嘗往來遊憩焉。杏亭尙在, 至今過者覽物而思人云。 (구두점 필자)

공의 휘는 정간이요 자는 고부이니, 계통은 전성(전의)에서 나왔고 태사공의 11대손이다(『천년사』 국역자도 '10대손의 오기인 듯하다'고 주기하였다). 일찍 사헌부에 오르고 이조를 두루 거쳐 나가서는 도관찰사가 되었으며, 만년에 임금의 장려를 입어 중추원사에 발탁되었다. (중략) 나이 여든에 항상 노래자의 춤과 어린아이의 재롱으로 백세의 어버이를 즐겁게 하고 또 늘 경수연을 베풀어 즐거움으로 삼으니, 효순한 행실이 임금에게까지 알려져, 세종대왕께서 가전충효 세수인경 여덟 자를 손수 써서(手書) 하사하시고, 이어 아름다움을 포창하는 교서(典敎)가 있었으니 최단[郾]과 서적의 미행을 끌어대고 당 선종과 송 인종의 총장(寵獎)을 뒤따른 것이었다. 이미 숭반(崇班)과 궤장의 하사가 있었고 또 중궁에 명하여 술과 풍악을 내리시니, 영광이 세상에 빛나 사람들이 보고 감동하였다. 그때 이름난 공경들이 잔치 자리에 모두 모여 권홍·맹사성·황희·하연·변계량·정인지 등 여러 현인이 서문으로 그 덕을 기리고 시로 그 아름다움을 읊어 경수시서 한 질이 세상에 간행되었으니, 공의 하늘에서 타고난 성효를 알고자 한다면 이 시서 한 부에서 상고하여 믿을 수 있다. (중략) 공의 아들 영암공 사혜(士惠)가 안렴사 김사렴 선생의 손녀에게 장가들어 청주 오근촌에 살았는데 그늘 드리운 은행나무가 있어 공이 일찍이 왕래하며 놀고 쉬었다. 행정(杏亭)이 아직 남아 있어 지금도 지나는 이들이 그것을 보며 옛사람을 그리워한다고 한다. (필자 번역, 『천년사』 국역 참조)

다. 행록 문면이 확정해 주는 것

첫째, 전거 사슬이 확증되었다. 갑술보 발문(1754)이 인용한 "世宗大王手書賜家傳忠孝世守仁敬八字"라는 구절이 행록 문면에 한 자도 다르지 않게 실재함이 확인되었다. 발문의 증언은 정확했고, 갑술보 단계의 세종 귀속 판단이 실재하는 문헌(행록)에 근거한 것이었음이 입증된다.

둘째, 행록의 용어는 '수서(手書)'이며 '어필(御筆)'이 아님이 직접 확인되었다. 이로써 원문이 확인되는 전근대 문헌 가운데 '御筆'을 쓴 것은 1722년 유생 상소(승정원일기 수록)가 유일하다는 본고의 판정이 간접 확인에서 직접 확인으로 격상되었다.

셋째, 행록 작성자가 실록 수록 교서의 문면을 인지하고 있었음이 드러났다. 행록은 교서(典敎)가 최단(崔鄲)·서적(徐積)의 미행과 당 선종·송 인종의 총장을 인용하였다고 서술하는데, 이는 실록 수록 교서 원문의 "唐崔鄲一門孝友, 宣宗賜堂名以寵之; 宋徐積事母純篤, 仁宗授官爵以旌之"와 정확히 대응한다(행록 전사의 '崔郾'은 자형이 유사한 '崔鄲'의 오기 내지 이표기로 판단).48 즉 행록은 막연한 구전이 아니라 교서 문면(또는 그 정확한 전승)에 접근한 상태에서 작성된 기록이다. 다만 이는 행록의 문헌적 성격을 높여 줄 뿐, 교서에 없는 '수서 하사' 서술의 전거를 제공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교서를 정확히 알던 작성자가 여덟 자 하사를 교서 '앞에'(登聞于天 → 手書賜八字 → 繼有褒美之典敎) 배치한 서사 구조는, 1432년 사건군에 대한 후대의 통합적 재구성이라는 성격을 보여 준다.

넷째, 성립 연대의 상하한이 좁혀졌다. 행록은 경수시서 한 질이 세상에 간행되었음(有慶壽詩序一帙, 刊行于世)을 언급하므로 『경수집』 초간(1509) 이후에 성립하였고, 갑술보 발문(1754)에 인용되므로 그 이전에 성립하였다. 즉 행록의 성립은 1509~1754년 사이로 확정된다. 이 구간은 1722년 상소를 포함하므로, 행록과 상소의 선후 관계는 이 확인만으로는 판정되지 않는다. 다만 양자가 노래자 고사, 여덟 자 전문, 사연(賜宴)이라는 공통 요소를 공유하면서 용어(手書/御筆)를 달리한다는 점은, 같은 청주 유림·문중 전승 계통 안의 두 갈래 문서화로 볼 개연성을 높인다.

다섯째, 행록에는 오류도 확인된다. 이정간을 태사공의 '11대손'이라 한 것은 세계(世系) 산정상 10대손(11세)의 착오로 보이며 『천년사』 국역자도 이를 지적하였고, 전사에는 판독이 갈리는 글자(宸/震, 鄲/郾, 蔭/菱)가 있다. 이는 행록 역시 무오류의 권위가 아니라 비판적으로 읽어야 할 후대 기록임을 보여 주는 세부이다.

행록이 그 이전의 가장(家狀)·행장류를 전재했을 가능성은 여전히 배제할 수 없으며, 서원 소장 원본의 현전 여부와 정확한 성립 시점, 그리고 갑술보 발문이 병렬 전거로 든 삼조설(1574)과의 관계(행록이 삼조설에서 유래했는지, 독립적 전승인지)는 원본 실사로 판별할 남은 과제이다.

5. 근대의 재발견 — 1937년과 그 이후

1937년 조선어학회의 이극로(李克魯)가 송천서원 『서원행록』의 기록을 접하고 이정간 후손(고 이정로 가) 소장 족보를 열람하여, 권두에 넉 자씩 두 줄로 실린 여덟 자를 확인하였다. 이 사실은 당시 동아일보에 「세종대왕 어필 발견」으로 보도되었고 『한글』 5호에도 관련 기록이 남았다.49 이 단계의 성격은 '새로운 사료의 생산'이 아니라 '기존 문중 자료의 확인과 공표'였다는 점이 중요하다. 즉 근대의 편찬·보도는 기존 자료를 정리·공표한 것으로 확인되며, 어필 귀속의 전거 자체를 새로 추가한 것은 아니다. 다만 '발견'이라는 보도 프레임이 이후 '현존 유일의 세종 필적'류의 대중적 서술로 증폭된 측면은 후술한다.

2005년 서지학자 천혜봉이 세종 친필로 추정되는 「세종대왕어사희우정효령대군방문」 서첩을 공개하면서 필체 비교의 준거가 생겼다. 구로문화대전은 족보 수록본이 이 서첩과 같은 필체를 사용하고 있으나 '실제 세종의 글씨가 아니라 모사한 것으로 여겨진다'고 서술한다.50 언론 검증 보도 역시 '국가가 세종 어필로 공인한 바 없으며, 어필의 모각으로 추정될 뿐'이라고 정리하였다.51 이것이 현재 학계·공적 기관 차원의 견해에 가장 근접한 서술이다.

6. 『전의예안이씨천년사』(1999)와 그 이전의 현대 문중 서술 — 두 서사의 병존과 '어제어필'의 소급

가. 『천년사』 본문의 두 서사

6차 개정에서 확보한 『천년사』 제6편의 문면은, 1999년 시점의 문중 공식 서술 안에 여덟 자 하사의 시점과 성격에 관한 서로 다른 두 서사가 병존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제1서사는 1432년 포장 국면설이다. 행록(575~576면)은 여덟 자 수서를 1432년 사건군의 서두에 놓고, 『경수집』 국역본 간행사(1990, 559면 전재) 역시 "세종이 그 탁행을 가상히 여겨 「가전충효 세수인경」 여덟 자를 친서(親書) 하사하시며 이어 임자년(1432) 4월 벼슬을 자헌대부중추원사에 특서하시고"라 하여 여덟 자 하사를 1432년 특서에 선행시킨다.52 1722년 상소가 발탁(擢拜) 뒤에 어필을 놓은 것과 순서는 다르나, 모두 1432년 전후의 생전 은전으로 서술하는 계열이다.

제2서사는 1439년 임종 하사설이다. 『천년사』 557면은 "세종대왕이 임종(臨終)에 친히 문병 오시어 어제어필(御製御筆)로 하사한 가전충효 세수인경의 팔자는 우리 전의이성이 대대로 지켜나가는 가훈이 되었다"고 서술하고53, 565면도 "공의 임종에 친자문병(親自問病)하여 … 팔자를 친서 하사하시니"라 하며, 572면은 그 전거로 문집을 지목하여 "다만 『농수집(聾叟集)』에 공의 임종(臨終)에 세종이 친자문병(親自問病)하고 공의 생전사후에 여수도도(如水滔滔)한 충효지심에 깊이 감동하여 그 자리에서 가전충효 세수인경 팔자를 친제어필(親製御筆)하여 하사하였다라고 되어 있으므로"라고 인용한다. 종전 지면의 인쇄 상태로 판독이 어려웠던 이 문헌명은 7차 개정에서 확보한 재판독본에 의해 『농수집(聾叟集)』으로 확정되었다(자형은 龍 아래 耳의 聾이 분명하다).54 이 임종설은 실록(임종 시점인 1439년 9월 27일 졸기에 문병·어필 언급 없음, Ⅲ장 1절 바항)은 물론 행록·상소·발문 등 전근대 전승 문헌 어디에서도 확인되지 않던 요소로, 현재까지 확인되는 범위에서는 『천년사』가 인용한 『농수집』이 최초 출처 후보이다.

다만 『농수집』의 동정은 확정되지 않았다. 한국문집총간·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등 공개 데이터베이스에서 『聾叟集』이라는 서명의 문집은 현재까지 확인되지 않는다.55 유사 서명으로 『농수집(農叟集)』(최천익, 1712~1779, 경주최씨)과 『농수유고(農叟遺稿)』·『농수수문록(農叟隨聞錄)』(이문정, 1656~1726, 전주이씨)이 확인되고, 호가 농수(聾叟)인 인물로 전필기(全必錡, 1691~1756, 옥천전씨)가 확인되나, 세 경우 모두 자형(農/聾)이 다르거나 성관이 다르고 이정간 관련 기사의 존재가 확인되지 않는다. 따라서 『농수집』이 어느 시대 누구의 문집인지, 문중 소장의 필사 문집류인지 여부는 실물 조사로 확정할 사항이며, 임종설과 '친제어필' 표현의 성립 연대 역시 그 동정이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상한을 특정할 수 없다(하한은 『천년사』 간행 시점인 1999년).

나. '어제어필' 표현의 소급 — 용어 사다리의 수정

본고 5차본까지는 '어제어필(御製御筆)'을 현대 문중 문서(「우리 가훈의 내력」, 2022년 이후 형태) 단계의 부가로 파악하였다. 그러나 위 557면의 문면으로 이 표현이 늦어도 1999년 『천년사』 본문에 이미 존재함이 확인되었고, 572면의 인용이 정확하다면 그 연원은 『천년사』가 인용한 『농수집(聾叟集)』('친제어필')으로 더 소급될 수 있다(단 『농수집』 자체의 성립 연대는 미상). 따라서 용어의 사다리는 다음과 같이 수정된다: 手書(행록·1754 발문) → 御筆(1722 관찬 수록, 전근대 유일 용례) → 친서·어필(1990 간행사·현대 국역) → 御製御筆(늦어도 1999 『천년사』, 연원은 인용 문헌 『농수집』의 '親製御筆'로 소급 가능) → 御製御筆(2022년 이후 문중 문서, 『천년사』 계열 서술의 계승). 즉 2022년 문서의 '어제어필'은 신조가 아니라 1999년 공식 씨족사의 용어를 이어받은 것이며, 부가의 실제 시점을 확정하려면 『농수집』의 동정과 근대 이후 판본 대조가 필요하다.

다. 세부 일자의 불일치

『천년사』 572면은 1432년의 은전을 4월 8일 탁승 교지, 4월 26일 교서와 사궤장, 5월 4일 영친연으로 배열하나, 실록 기사는 4월 25일 교서·궤장 하사와 5월 3일 사은 전문을 전한다. 하루 안팎의 이 차이가 간지 환산의 문제인지, 『경수집』 계통 기록과 실록의 차이인지는 원문 대조로 확정할 사항이다.56

라. 유허비명(1979 건립) — 두 서사 사이에서 금석문이 택한 서술

7차 개정에서 확보한 『천년사』 제7편 864~865면의 「효정공휘정간유허비명(孝靖公諱貞幹遺墟碑銘)」은 두 서사의 병존 문제에 근현대 금석문의 층위를 더한다.57 비는 기미(1979)년 3월 4일 청주 송천 구지에 전서공·효정공의 추원단을 겸하여 세워졌고, 비문은 화수회장 희승(熙昇)이 무오년 10월에 지어 "전의·예안이씨 화수회장 희승 근지(謹識)"로 서명하였다. 지면의 간지 병기 '무오(1976)'는 내적으로 불일치하며(무오는 1978년, 1976년은 병진년), 비 건립(1979) 직전인 1978년 찬술로 보는 것이 정합적이다. 찬자 희승은 화수회 제3대 회장(재임 1948~1989)으로, 문중에서 국어학자 이희승(李熙昇, 1896~1989)과 동일 인물로 전해진다.

비문은 여덟 자를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세종대왕께서 이 지극한 효행을 들으시고 특명으로 공의 품계를 높이시고 궤장과 겸하여 주악을 하사하시어 잔치를 베풀어 주시는 한편 가전충효 세수인경 여덟 자를 친히 써 주시고 또 정부인 낙안김씨를 정대부인으로 봉하시니." 즉 이 비문은 여덟 자 하사를 1432~1434년의 포장 국면에 배치하는 제1서사 계열이고, 표현 역시 '친히 써 주시고'(수서 계열)에 머물러 '어제어필'을 쓰지 않는다. 행록·갑술보 발문의 절제된 용어가 1978년의 금석문에까지 이어진 것으로, 같은 『천년사』 안에서 『농수집』 계열(임종설·친제어필)과 구별되는 흐름이다. 아울러 비문은 광복 후 국토 분단으로 장단(長湍)의 묘소를 33년간 첨소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달래고 길이 트일 때까지 세일천(歲一薦)의 추모 향화를 이 비 앞에서 이어가려는 뜻을 스스로 밝히고 있어, 유허비가 실향 문중의 의례 대체 처소로 기능하였음을 보여 준다. 명(銘)이 한문이 아닌 국문 시조 형식이라는 점도 찬자의 이력과 시대상을 반영하는 특징이다.

7. 근현대 문중 기록 — 「우리 가훈의 내력」과 2022년의 재확인

가. 문서의 개요

전의·예안이씨화수회본부가 보관하는 「우리 가훈의 내력」은 앞면에 여덟 자를 게시하고 그 내력을 해설하는 문중 문서이다.58 문서는 여덟 자를 효정공이 세종으로부터 받은 어제어필(御製御筆)로 규정하고, 이정간을 시조 10세로 표기하며, 왕이 주악(酒樂)을 하사하여 충효를 포정(褒旌)하였다고 서술한 뒤, 승정원일기 1722년 7월 18일 기사의 원문과 국역을 수록하고 "『승정원일기』는 두말할 것도 없이 국가적인 확실한 기록"이라고 평가한다. 말미에는 이 기사가 2022년 10월 용성(用成, 중파 29세) 종인에 의해 확인되었다는 발견 경위가 부기되어 있다.

나. 2022년의 재확인 — 1937년과의 구조적 평행

이 문서가 전하는 발견 경위는 그 자체로 전승사의 일부로서 기록될 가치가 있다. 1937년 이극로가 『서원행록』의 기록을 실마리로 족보 권두의 실물을 확인하였다면, 2022년에는 문중 구성원이 관찬 기록(승정원일기)에서 어필 진술을 확인하였다. 85년의 간격을 두고 반복된 이 두 장면은, 전승 공동체가 내부 전승을 외부의 공적 기록과 연결함으로써 전승의 근거를 강화해 온 일관된 패턴을 보여 준다. 특히 2022년의 확인은 본 연구가 Ⅲ장 2절에서 분석한 바로 그 기사를 문중이 독자적으로 찾아낸 것으로, 관찬 기록상 최초 확인 지점(1722)에 대한 본고의 판단과 문중의 조사 성과가 동일한 사료 위에서 만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다. 해석의 층위 — 기록의 진정성과 진술의 사실성

문서의 평가("국가적인 확실한 기록")는 사료학적으로 절반은 전적으로 정확하다. 승정원일기 해당 기사의 문서적 진정성, 즉 그것이 실재하는 관찬 원본 기록이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다만 사료 비판에서는 기록의 진정성과 그 기록에 담긴 진술의 사실성을 구분한다. 이 기사가 확실하게 입증하는 것은 '1722년에 청주 유림이 조정에 이와 같이 진술하였다'는 사실이며, 진술의 내용인 1432년의 어필 하사 자체는 그 진술의 전거 사슬(상소 ← 유림·서원 전승 ← ?)을 거슬러 확인해야 할 별개의 문제로 남는다. 기사 스스로 "고을 사람들이 지금까지 아름답게 일컫는다"라 하여 진술의 성격이 전승임을 밝히고 있다는 점은 Ⅲ장 2절에서 본 바와 같다. 이 구분은 어필 전승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각 사료가 무엇을 입증하고 무엇을 입증하지 않는지를 정확히 하는 것이다.

라. '어제어필' — 용어 격상의 계보

문서가 사용한 '어제어필(御製御筆)'은 임금이 글을 짓고(製) 아울러 썼다(筆)는 이중의 귀속이다. 그러나 승정원일기 원문의 "遂以御筆, 書…八大字"는 임금이 '썼다(書)'고만 하며, 지었다는 요소는 명시하지 않고, 행록·갑술보 발문의 원문 용어는 '수서(手書)'에 머문다. 6차 개정에서 확인된 바와 같이(Ⅲ장 6절), '어제어필'은 이 문서에서 처음 만들어진 표현이 아니라 늦어도 1999년 『천년사』 본문(557면)에 이미 등장하며 그 연원은 『천년사』가 인용한 문집('친제어필')으로 소급될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이 문서의 '어제어필'은 1999년 공식 씨족사 계열 서술의 계승으로 자리매김되며, 수서(手書) → 어필(御筆, 1722) → 친서·어필(현대 국역) → 어제어필(늦어도 1999 → 2022 이후 문서)로 이어지는 용어 격상의 사다리 안에서 최종 단계에 해당한다. 아울러 문서의 인용문에는 원기사와의 전사상 차이(御畢·入大字)와 인용 범위의 문제("州人至今艶稱之" 구절 미포함)가 확인되므로, 문서 개정 시 원문 교정이 필요하다.59

Ⅳ. 문헌 비교: 표현의 변천

각 문헌이 이 사안을 어떤 표현으로 다루는지 비교하면 전승의 증폭 과정이 드러난다.

작성 시점 문헌 관련 표현(요지) 층위 판정
1432 세종실록 4.25 교서 특진·궤장 하사·효행 포창. 어필 언급 없음 ① 확인되는 사실
1432 세종실록 5.3 전문 관작·궤장·안석에 대한 사은. 어필 언급 없음 ① 확인되는 사실
1456 신도비 한문 전문 판독(서·계보·명 전 범위): 褒書·超陞·几杖·酒樂. 어필 언급 없음 ② 사건 근접 기록(전문 확인)
1509 초간 (성립 1432 전후) 경수집(현전은 후대 판본) 확인된 하시(권홍·맹사성·황희·유관) 는 교서·궤장·구장·주악을 노래하나 여덟 자 언급 없음 ②에 준함(판본 층위 복합: 추록·일실·보충 이력)
1574 만력보 삼조설 '세종대왕 수서(手書)'(보도에 근거, 원본 미확인) ② 후대 기록(잠정)
1509~1754 사이 성립 송천서원 서원행록 (천년사 수록 전사로 원문 확보) '世宗大王手書賜…八字'(한문 전문 확보). 교서 고사(崔鄲·徐積)를 정확히 반영. 어필 아닌 手書 ③ 문중·서원 전승(문면 확보, 원본 실사 필요)
1722 승정원일기 7.18 기사(청주 유생 상소) '遂以御筆, 書家傳忠孝世守仁敬八大字, 以褒之' — 유림 전승의 진술이 관찬 문서에 수록. '州人至今艶稱之'로 전승임을 자술 ② 후대 기록(관찬 수록)
1754 갑술보 이징국 발문(원문 확보) 구보 권두 8자 인행·필적 유래 무표기 → 행록·청강공 수서를 전거로 '手書·特賜'로 판단, 모사(重模) 수록. 원문에 御筆 표현 없음 ② 후대 기록
1773 승정원일기 4.3 기사 영조, 이정간 10대손 이징성 소견·궤장 하사. 준거는 궤장, 어필 언급 없음 ① 확인되는 사실(1773년의)
1937 동아일보·한글 5호 '세종대왕 어필 발견' 근대 보도
1990 경수집 국역본 간행사(이종관) '八字를 親書 下賜하시며 이어 壬子(1432) 4月 … 特敍' — 1432년 특서 전의 친서 하사로 서술 ⑤ 현대 문중 정리(간행 이력 서술은 자료적 가치)
1999 천년사 본문 557면 '임종에 어제어필로 하사'; 572면은 그 전거로 『농수집(聾叟集)』의 '親製御筆' 인용 ⑤ 현대 문중 정리(임종설·어제어필의 최초 확인 지점, 『농수집』 동정 필요)
2022 이후 문중 문서 「우리 가훈의 내력」 '어제어필(御製御筆)'로 규정, 1722년 기사를 '국가적인 확실한 기록'으로 평가 ③ 문중 전승(1999 계열 서술의 계승)
현재 향토문화전자대전 등 '세종 어필의 모사로 여겨진다', 국가 공인 없음 ④ 학계·공적 견해

표에 더하여 7차 개정에서 확인된 문헌들의 위치는 다음과 같다. 『세종실록』 세종 21년(1439) 9월 27일 졸기(층위 ①)는 임종 국면의 당대 기록으로서 조위·증시만을 전하고 문병·어필을 언급하지 않으며, 「정대부인김씨묘표」(1445, 층위 ①에 준하는 당대 기록)는 가범을 정면으로 칭송하면서도 여덟 자를 언급하지 않고, 「효정공휘정간유허비명」(1978 찬·1979 건립, 층위 ⑤ 현대 문중 정리)은 제1서사 계열에서 '친히 써 주시고'라는 수서 계열 표현을 유지한다. 표현의 변천도 주목된다. 원문이 확인되는 범위에서 정리하면, 서원행록(한문 전문 확보)과 갑술보 발문(1754, 원문 확보)의 용어는 일관되게 '수서(手書)'·'특사(特賜)'이고, '어필(御筆)'이라는 격식화된 용어의 전근대 용례는 1722년 유생 상소(승정원일기 수록)가 유일하다. 갑술보 발문에 '어필'을 귀속시킨 것은 현대 국역 단계의 보충이며, '어제어필(御製御筆)'은 늦어도 1999년 『천년사』 본문에 등장하여 2022년 이후의 문중 문서로 이어졌다(연원은 『천년사』가 인용한 문집으로 소급 가능). 이후 근대 보도에서 '어필 발견'으로, 현대의 일부 대중 서술에서는 '이 세상에 남아 있는 유일한 세종대왕 필적'으로까지 증폭되었다. 반면 공적 기관의 유물 해제는 '모사(模寫)'로 한정한다. 또한 인물 정보도 증폭이 확인된다. 실록 교서는 '경의 나이 70을 지났고 어머니는 90을 넘었다'고 하였으나60, 후대 전승과 현대 서술에서는 '80세의 이정간이 100세(또는 102세)의 노모 앞에서 색동옷을 입었다'는 형태가 통용된다. 이는 전승 과정에서 흔히 나타나는 수치의 정형화·극대화로 이해되며, 어필 귀속 서사의 전승 환경을 보여주는 방증이다.

Ⅴ. 근현대 전승과 『전의예안이씨천년사』 편찬 과정

1. 장의 목적과 서술 원칙

이 장은 특정인을 비판하거나 옹호하기 위한 장이 아니다. 『전의예안이씨천년사』(1999, 이하 『천년사』)가 어떠한 자료를 근거로, 어떠한 편집 과정을 거쳐 오늘날의 서술을 형성하였는지를 분석하는 장이다. Ⅲ장 6절이 『천년사』의 문면(두 서사의 병존, '어제어필'의 소급)을 다루었다면, 이 장은 그 문면을 산출한 편찬의 과정과 조직을 다룬다.

서술 원칙은 네 가지다. 첫째, 판단은 확보된 문면 — 간행사(「이 책을 간행하면서」), 머리말, 본문(제6편 550~579면), 문헌록(제7편 860~865면) — 으로만 한다. 둘째, 발행인과 집필자는 동일 개념이 아니다. 발행·감수·정리·집필·편집·교정은 서로 다른 역할이며, 각각 별도의 전거로 입증되어야 한다. 셋째, 인물의 역할에 관하여 '만들었다', '꾸며냈다', '창작하였다', '왜곡하였다'는 서술과 '아무 역할도 없었다'는 서술을 모두 배제한다. 현재의 사료는 그 어느 쪽도 입증하지 않는다. 넷째, 확인되지 않는 사항은 추론하지 않고 '현재까지 확인되지 않는다'로 종결하되, 확인 경로(검증 절차)를 병기한다.

2. 편찬 체제의 복원 — 확인되는 것과 확인되지 않는 것

간행 경위는 간행사로 확인된다. 1997년 5월 30일 화수회 제22차 정기총회에서 간행이 가결되었고, 24개월의 편찬을 거쳐 1999년 5월 총 1,134면 규모의 초간본이 간행되었다.61 편찬 조직으로 확인되는 것은 간행위원장 이대선(李大善), 편집위원장 이용호(龍鎬), 파별 집필 분담(상조사와 백파 문중사는 이용호, 중파는 이준상, 계파는 이태호), 흥세·종원·준규·징노 제종에 의한 심의, 그리고 발행인 이종관(李鍾寬) 회장의 전문 감수이다.62 간행사는 집필이 각 문중의 원고와 자료를 근거로 이루어졌다고 하므로, 집필 층위 아래에 문중 제공 원고의 층위가 별도로 존재하였음도 확인된다. 다만 그 원고들의 현전 여부는 확인되지 않는다.

9차 개정에서는 권말 부속문의 실물 지면 세 종이 추가로 확보되어 편찬 체제의 복원이 크게 전진하였다. 첫째, 1133면 「이책을 편찬하는데 도움을 주신 분들」(3파별 순위)은 편찬 조직의 전체 명단이다.63 그 문면은 다음과 같다.

직책·단위 명단(1133면 표기)
회장 종관(鍾寬)
간행위원장 대선(大善)
상무이사 상호(尙鎬)
편집위원장 용호(龍鎬)
심의위원회 위원장 흥세(興世)
심의위원회 위원 종원(宗遠)·준규(準圭)·징노(徵魯)
총정리 및 편집 태호(泰浩)
교정 태세(泰世)
제1편 집필 종관(鍾寬)
제2·3·4·5편 공동집필자 희옥(熙玉)·종원(宗遠)·용호(龍鎬)·태호(泰浩)
제6편 대사성공파문중사 대표집필 용호, 집필 한국(漢國), 자료제출자 교선·희옥·한철·원호 등
제6편 문장공파문중사 대표집필 준상(準尙), 자료제출자 준기·용성·용만·영선·헌구·형선·준철
제6편 선부전서공파문중사 대표집필 태호(泰浩), 집필 종관(鍾寬), 자료제출자 명호·기호·충세·광호
제8편 정리 지선(之善)

이 명단은 간행사의 서술(편집위원장 용호, 백파 용호·중파 준상·계파 태호의 파별 분담)과 정합하면서, 종전에 미확인이던 항목 여럿을 새로 확정한다. ⑴ 심의위원회의 위원장(흥세)과 위원(3인)의 직위 구분, ⑵ '총정리 및 편집' 담당(태호)과 '교정' 담당(태세)의 존재, ⑶ 제1편의 집필자가 종관이라는 것, ⑷ 제6편 선부전서공파문중사에 대표집필 태호와 별도의 '집필' 종관이 병기된다는 것, ⑸ 각 파 문중사에 자료 제출자의 층위가 명단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둘째, 1134~1135면의 「편집후기(編輯後記)」는 主筆 이태호(李泰浩)가 1999년 6월 1일 자로 쓴 것으로, 편찬 실무에 관한 1차 증언이다.64 후기에 따르면 주필은 1998년 11월 1일에 붓을 들어 1999년 6월 1일에 놓았으며(만 7개월, 병중 집필), 만력보 창간·삼조설 서술·계제식 기재 창안의 주인공인 청강공(이제신)의 직계 후손이라는 자부심을 집필의 토대로 술회한다. 특히 후기는 "자기 직조(直祖)들의 사적(事績)을 과장(誇張) 또는 허위(虛僞)로 미화(美化)시키려는 일부 종인(宗人)들의 억지를 '역사는 왜곡할 수 없다'는 학자적 양심으로 삭제(削除)하였음을 밝혀둔다"고 명시한다. 이 문면은 두 가지를 확정해 준다. ⑴ 편찬 과정에 과장·미화를 요구하는 압력과 이를 걸러내는 편집 판단이 실재하였다는 것, ⑵ 따라서 『천년사』의 최종 문면은 주필의 편집 필터를 거친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간행사의 '24개월 편찬'과 후기의 '7개월 집필'은 모순이 아니라, 전자는 총회 가결(1997. 5. 30)부터의 사업 기간, 후자는 주필의 원고 집필 기간으로 정합적으로 읽힌다.

셋째, 판권지는 판본 이력과 직책을 확정한다.65 서기 1999년 기묘 6월 1일 인쇄·발행, 서기 2002년 임오 4월 30일 증보판 발행, 발행처 전의·예안이씨화수회본부(서울 동대문구 장안동), 발행인 이종관(李鍾寬), 편집인 이대선(李大善), 상무이사 이상호(李尙鎬), 편찬 이태호(李泰浩), 인쇄 기창족보사이다. 세 가지에 유의한다. ⑴ 판권지의 발행일(1999. 6. 1)과 종전 서술의 '1999년 5월'은 모순이 아니라, 후자가 머리말·간행사의 작성 시점이고 전자가 실제 발행일로 정합된다. ⑵ 판권지의 '편집인'(대선)과 명단의 '편집위원장'(용호)은 직명이 달라 서로 다른 역할 표기로 보이며(간행 책임자로서의 편집인 대 편집 실무 책임자로서의 편집위원장), 동일 평면에서 혼용하지 않는다. ⑶ 증보판(2002)의 존재가 새로 확인되었으므로, 본고가 인용해 온 지면(제6편 550~579면, 제7편 860~865면, 권말 1133~1135면)이 초간본과 증보판 중 어느 판본에 속하는지, 그리고 두 판본 사이에 해당 서술의 이동·수정이 있는지의 대조가 새 검증 과제가 된다(확보된 판권지 자체는 증보판 발행 사항을 포함하므로 증보판 계열 인쇄본으로 판단된다).

이로써 종전의 미확인 항목 가운데 ⑵ 편찬·교정위원의 전체 명단은 확보되었고(1133면), ⑶ 실무 절차는 편집후기로 일부(주필·집필 기간·삭제 원칙)가 확인되었다. 반면 ⑴ 가운데 발간사의 존부·문면과, ⑷ 편찬 회의의 개최·회의록의 존부는 여전히 확인되지 않는다. 확인 현황을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편찬 관련 항목 확인 상태 전거·비고
간행 주체·경위(총회 가결, 24개월 편찬) 확인 간행사
발행인(이종관, 화수회 회장) 확인 간행사·머리말
간행위원장(이대선) 확인 간행사
편집위원장(이용호) 확인 간행사
파별 집필 분담(이용호·이준상·이태호) 확인 간행사
심의(흥세·종원·준규·징노) 확인 간행사
전문 감수(이종관) 확인 간행사 문면
부분 정리자 명기(오창문중 정착사 등) 확인 579면 「각 문별 이동사기」 + 1133면 명단
편집후기의 존부·문면 확인(9차) 1134~1135면, 主筆 이태호, 1999. 6. 1
발간사의 존부·문면 현재까지 확인되지 않는다 권두 지면 미확보
편찬·교정위원 전체 명단 확인(9차) 1133면 「이책을 편찬하는데 도움을 주신 분들」
원고 작성·편집·교정의 실무 절차 일부 확인(9차) 편집후기(집필 기간·삭제 원칙); 세부 절차는 미확인
편찬 회의의 개최·회의록 현재까지 확인되지 않는다 화수회 기록 조사 필요
판권지의 발행·편집 직책 확인(9차) 발행인 종관·편집인 대선·상무이사 상호·편찬 태호
증보판(2002. 4. 30)의 존재 확인(9차) 판권지; 초간/증보판 대조는 신규 과제

3. 집필 분담과 서술 단위의 귀속

『천년사』 579면 「각 문별 이동사기」는 부분별 정리·집필자를 병기하는 드문 내부 기록이다. 그에 따르면 11세 효정공의 송천별서 내력과 오창(梧倉)문중의 청주·청원권역 정착사는 종관(鍾寬)이 정리하였고, 평간공파는 명호·기호가, 청강공파는 태호가 직접 기술하였다.66 이 문면은 두 가지를 확정해 준다. 첫째, 『천년사』의 서술 단위별 담당자가 편집위원장·파별 집필자 외에도 존재하였다는 것이고, 둘째, 가훈 관련 서술이 집중된 제6편 선부전서공파 부분 가운데 적어도 오창문중 정착사 단위는 담당자가 명기되어 있다는 것이다.

다만 579면의 문면은 서술 단위의 경계를 면 단위로 특정하지 않는다. 행록 수록 절(573~576면)과 임종·친서 서사를 담은 565면의 서술이 '오창문중 정착사' 단위에 속할 개연성은 크지만, 개별 절·문장의 귀속은 개연성 판단에 머물며 단정하지 않는다. 집필자를 특정할 자료 — 파별 제출 원고, 편집 지시 기록, 심의·편찬 회의록 등 — 는 현재까지 확인되지 않는다.

9차 개정에서 확보된 1133면 명단은 이 판단을 한 단계 좁힌다. 명단상 제6편 선부전서공파문중사의 집필 귀속은 '대표집필 태호, 집필 종관'으로 명기되어 있으므로, 임종설(557면)과 『농수집』 인용 문면(572면)이 실린 550~579면 일대의 집필 책임 범위는 명단 문면상 이 두 사람으로 좁혀진다.67 그러나 세 가지 이유에서 특정인의 '창작'으로 단정하는 것은 여전히 성립하지 않는다. ⑴ '대표집필'과 '집필'의 병기가 두 사람 사이의 실제 분담 — 절·문장 단위의 경계 — 을 특정해 주지는 않는다. ⑵ 572면은 『농수집』을 명시 인용하는 문면이므로, 해당 서술이 집필자의 창안인지 선행 문헌의 전재인지는 『농수집』의 실물 동정 전까지 판정할 수 없다(하한 '늦어도 1999년' 유지). ⑶ 편집후기가 명시하듯 최종 문면은 주필의 편집 판단(과장·허위 삭제 원칙)을 거쳤으므로, 인쇄된 문면과 제출 원고 사이에 편집 층위가 개재한다.68 요컨대 집필 귀속의 '범위'는 명단으로 확정되었으나, 서술의 '발생'은 여전히 열린 문제다.

4. 이종관(李鍾寬)의 역할 — 항목별 검토

연구 지시에 따라 이종관의 생애, 관직(판사 경력), 문중·화수회 활동, 『천년사』 편찬 참여의 성격을 항목별로 검토한다. 검토 원칙은 1절과 같다. '만들었다' 또는 '아무 역할도 없었다'는 결론을 전제하지 않고, 사료가 직접 입증하는 범위로만 서술한다.

가. 인물의 동정

본 연구의 초기 조사에서는 공개 데이터베이스 검색으로 인물을 특정하지 못하였으나, 『천년사』(1999)의 확보로 동정이 확정되었다. 이종관(李鍾寬)은 1999년 당시 전의예안이씨화수회 회장으로서 『천년사』의 발행인이자 머리말의 저자이며, 간행사는 "발행인이신 종관(鍾寬) 회장께서는 이 책 전문을 감수해 주시고"라고 하여 그가 전문 감수자였음을 명기한다.69 한자 표기가 寬으로 확정됨으로써 동명이인과의 혼동 가능성이 크게 줄었고, 후속 검증의 검색 조건이 갖추어졌다.

나. 사료로 확인되는 역할의 범위

확보된 문면은 네 가지 사실을 추가로 확정해 준다. 첫째, 이종관은 1990년 2월 1일 『경수집』 국역 4간의 간행사 저자로, 말미에 "전의이씨전서공파종회장 효정공19대손 종관(鍾寬) 재배근지"라 서명하였다.70 이로써 그가 효정공(이정간)의 19대손이며 1990년 당시 전서공파종회장이었음이 1차 문면으로 확정되었다. 그 간행사는 여덟 자를 '친서(親書) 하사' 후 1432년 4월 특서로 서술하므로, 이종관이 가훈 관련 서사를 공식 문서로 직접 작성한 최초의 확인 사례이기도 하다. 둘째, 『천년사』 568면은 공주 시목(효정공나무) 이식(1996~97년경 서술) 관련 기사에서 그를 "종관(鍾寬) 화수회 이사장"으로 지칭하므로, 회장 취임 이전 화수회 이사장 재임이 확인된다.71 셋째, 앞 절에서 본 대로 『천년사』 제6편 중 오창문중 정착사 부분의 정리자로 명기되어 있다(579면, 전절 참조). 넷째, 9차 개정에서 확보한 판권지는 그를 발행인(發行人)으로 재확인하며,72 1133면 명단은 그를 제1편의 집필자이자 제6편 선부전서공파문중사의 '집필'(대표집필 태호와 병기)로 명기한다.73 아울러 편집후기는 그를 "종사(宗事)의 자세와 선비의 곧곧함을 몸소 보여주시며 격려로 끈기 부어주신 화수회 회장"으로 술회하여, 주필에 대한 후원·격려의 역할을 별도로 증언한다.74

이로써 '이종관이 만들었다/정리했다'를 전제하지 않는다는 본 연구의 원칙은 유지하되, 사료가 스스로 말해 주는 범위 — 1990년 간행사의 저술, 화수회 이사장·회장 재임, 『천년사』 발행·전문 감수, 오창문중 정착사 부분의 정리, 그리고 제1편과 선부전서공파문중사의 집필자 명기 — 까지 확정 서술이 전진하였다. 다만 '집필자로 명기되어 있다'는 것과 '특정 절·문장을 그가 썼다'는 것은 별개이며, 후자는 대표집필자와의 분담 경계와 편집 층위(주필의 삭제 원칙)가 규명될 때에만 구체화될 수 있다.

한편 머리말은 그가 손자에게 효정공의 설화(새끼 밴 노루를 구해 준 이야기)를 들려준 일화로 시작하여, 한문 문헌을 읽지 못하는 한글세대를 위한 국문 씨족사의 필요를 편찬 동기로 제시한다.75 이는 가훈·효행 전승이 20세기 말에도 구술로 재생산되고 있었음과, 전승 매체가 한문에서 국문으로 전환되는 국면을 보여 주는 자료로서, 전승사 서술(Ⅺ장)의 근거가 된다.

다. 항목별 확인 현황

연구 지시가 열거한 검토 항목을 확인 상태별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확인'은 1차 문면(간행사·머리말·본문·서명)으로 입증되는 것에 한정하며, 그 밖은 모두 '현재까지 확인되지 않는다'로 종결한다.

검토 항목 확인 상태 전거 또는 검증 경로
판사 경력 현재까지 확인되지 않는다 법조 인명록·법원 직원록·관보 검색
생몰년·관직 이력 현재까지 확인되지 않는다 위와 같음
문중 활동 확인: 전서공파종회장(1990) 『경수집』 국역본 간행사 서명
화수회 활동 확인: 이사장(1996~97경) → 회장(1999) 『천년사』 568면·머리말
『천년사』 편찬 참여 확인: 발행인·전문 감수·오창문중 정착사 정리·제1편 및 선부전서공파문중사 집필자 명기 간행사·579면·1133면·판권지
발행인 역할 확인 간행사·머리말
실제 집필 참여 여부 확인(9차): 제1편 집필, 선부전서공파문중사 '집필'로 명기. 다만 대표집필(태호)과의 분담·절 단위 경계는 미확정 1133면·579면
편집 참여 여부 명단상 '총정리 및 편집'은 태호로 명기, 이종관은 편집 항목에 미명기 1133면; 실무 기록 확인 필요
최종 교정 참여 여부 명단상 '교정'은 태세로 명기, 이종관은 교정 항목에 미명기 1133면; 교정 기록 확인 필요
편찬 회의 참석 여부 현재까지 확인되지 않는다 회의록 확인 필요
회의록 존재 여부 현재까지 확인되지 않는다 화수회 기록 조사 필요
족보(대동보) 편찬 참여 현재까지 확인되지 않는다 대동보 서발문·편찬위원 명단

라. 검증 절차

한자 표기의 확정과 재임 이력(전서공파종회장 1990 → 화수회 이사장 → 회장 1999)의 확보로 검증 절차가 실행 가능해졌다. (1) 법조 인명록·법원 직원록·관보에서 李鍾寬을 검색하여 판사 경력을 확인한다. (2) 대동보(특히 20세기 후반 판본)의 서발문·편찬위원 명단에서 동인의 참여를 확인한다. (3) 화수회 회의록·회보에서 재임 기간과 활동, 그리고 『천년사』 편찬 회의의 기록을 확인한다. (4) 후대 기록에 미친 영향은 『천년사』의 가훈 관련 서술과 그 이전 문헌의 문면을 대조하여, 『천년사』 단계에서 새로 더해진 서술이 있는지를 판별하는 방식으로 측정한다. 이 대조는 개인의 기여 판정 이전에, 1999년 시점의 문중 공식 서술이 무엇이었는지를 확정하는 작업으로서 독립적 가치를 갖는다.

한편 종전 지시서에 언급된 『전성세고(全城世稿)』에 대해서는, 1897년 김근중이 간행한 대구 전의이씨(임진 의병장 이종문 계열) 세고가 확인되나76, 이는 여덟 자 문제와의 직접 관련성이 확인되지 않는 별개 계열의 문헌이다. 지시서가 지칭하는 『전성세고』가 이 책인지, 혹은 동명의 다른 문중 문헌인지의 확인이 선행되어야 한다.

5. 『천년사』의 인용 원자료와 인용 관계

『천년사』의 가훈 관련 서술은 두 층위로 구분된다. 하나는 원자료의 한문 전문 또는 국역을 그대로 싣는 전재(轉載) 층위(주로 행록 절과 제7편 문헌록)이고, 다른 하나는 그것들을 종합하여 새로 쓴 본문 서술 층위(555~572면 일대)이다. 확보된 지면에서 확인되는 인용 관계는 다음과 같다.

원자료 발생 층위 『천년사』 수록 위치·방식 확인 상태
『세종실록』 관련 기사 ⑴ 15세기 당대 기록 본문 연대 서술의 준거로 추정되나 인용 방식 미확인. 572면의 일자 배열(4.8/4.26/5.4)은 실록(4.25/5.3)과 상이 대조 필요
「정대부인김씨묘표」(1445) ⑴ 15세기 당대 기록 860면 원문·역문 전재 판독 완료
신도비문(1456) ⑴ 15세기 근접 금석문 570면 발췌, 860~864면 한문 전문·국역 전재 전문 판독 완료
족보 서발문(삼조설 1574·갑술보 발문 1754) ⑶ 족보 기록 본문 서술에 반영 추정. 직접 전재 여부는 미확보 지면에 있을 수 있음 부분 미확인
「효정공 송천서원 행록」 ⑷ 문중·서원 전승(성립 1509~1754) 573~576면 한문 전문·국역 전재 문면 확보, 원본 실사 필요
『승정원일기』 1722년 기사 ⑵ 후대 관찬 기록 확보 지면에서 인용 확인되지 않음(문중 차원의 확인은 2022년, Ⅲ장 7절) 미확인
『농수집(聾叟集)』 미상(동정 안 됨) 572면 인용 — 임종 문병설·'친제어필'의 전거 실물 미확인, 최우선 과제
『경수집』 국역본 간행사(1990) ⑸ 현대 문중 문서 559~560면 전재 확보
「효정공휘정간유허비명」(1978 찬) ⑸ 근현대 금석문 864~865면 전재 확보

이상의 관계를 층위별로 도식화하면 다음과 같다.

⑴ 15세기 당대 기록   세종실록(1432·1439)  묘표(1445)  신도비(1456)
       (여덟 자 언급 없음)                  |전재 860면  |전재 860~864면
                                            v            v
⑶ 족보 기록          만력보 삼조설(1574, 잠정) --> 갑술보 발문(1754)
                              ^ 전거로 인용            |본문 서술에 반영(추정)
⑷ 문중·서원 전승     서원행록(1509~1754 성립) ------+  |전문 전재 573~576면
                                                       v
⑵ 후대 관찬 기록     승정원일기 1722 상소(어필 최초 관찬 수록)
                       --- 확보 지면상 『천년사』 인용 여부 미확인
⑸ 현대 편찬          경수집 국역 간행사(1990) --- 전재 559~560면
   미상               농수집(동정 미상) --- 인용 572면(임종설·친제어필)
⑸ 근현대 금석문      유허비명(1978 찬) --- 전재 864~865면
                                |
                                v
                     『전의예안이씨천년사』(1999) 본문 서술(555~579면)
                                |
                                v
                     「우리 가훈의 내력」(2022 이후) --- '어제어필' 계승

이 구분이 답해 주는 것은 다음이다. 『천년사』가 그대로 인용한 것(행록·신도비문·묘표·유허비명·1990 간행사의 전재)은 원문 보존의 기능을 수행하여, 한문 문헌 중심의 전승을 국문 독자 공간에 재공급하였다. 본 연구가 전거 사슬을 확증할 수 있었던 것도 이 전재 층위 덕분이다. 반면 새로 편집한 부분(본문 서술 층위)에서는 종전 문헌에서 확인되지 않던 요소가 확인되는데, 이는 다음 절에서 다룬다.

6. 『천년사』 단계에서 비로소 확인되는 서술 요소

현재까지 확인되는 범위에서, 이전 문헌에는 없는데 『천년사』 본문에서 새롭게 등장하는 요소는 세 가지다. 첫째, 임종 문병설이다. 557면의 문장 "세종대왕이 임종에 친히 문병 오시어 어제어필로 하사한 가전충효 세수인경의 팔자는 우리 전의이성이 대대로 지켜나가는 가훈이 되었다"는, 실록 졸기(1439)·행록·1722년 상소·갑술보 발문·1990년 간행사 어디에서도 확인되지 않던 임종 국면 서사를 담은, 현재까지 확인되는 최초의 문장이다(Ⅲ장 6절 가항). 둘째, '어제어필(御製御筆)' 용어이다. 같은 557면에 등장하며, 572면은 인용 문헌의 표현을 '친제어필(親製御筆)'로 전한다. 셋째, 세부 일자의 배열(4월 8일 탁승 교지·4월 26일 교서와 사궤장·5월 4일 영친연)이 실록 기사(4월 25일 교서·5월 3일 사은 전문)와 다르다(Ⅲ장 6절 다항).

다만 여기서 두 명제를 엄격히 구분해야 한다. '『천년사』에서 최초로 확인된다'와 '『천년사』가 최초로 만들었다'는 같은 명제가 아니다. 572면이 임종설·친제어필의 전거로 『농수집(聾叟集)』을 명시적으로 인용하고 있으므로, 이 요소들은 『천년사』 편찬 단계의 부가가 아니라 그 인용 문헌으로 소급될 가능성이 열려 있다. 『농수집』의 실물이 동정되기 전까지, 이 요소들의 창안 주체와 성립 시점은 특정할 수 없으며, 특정 집필자에게 귀속시킬 자료 역시 현재까지 확인되지 않는다. 확정할 수 있는 것은 하한 — 늦어도 1999년 — 뿐이다.

9차 개정에서 확보된 1133면 명단은 이 지면의 집필 귀속 '범위'를 선부전서공파문중사의 대표집필 태호·집필 종관으로 좁혀 주었다. 그러나 이 좁혀짐이 위 두 명제의 구분을 해소하는 것은 아니다. 두 사람 사이의 분담 경계가 미확정이고, 572면 자체가 『농수집』을 명시 인용하며, 최종 문면이 주필의 편집 판단을 거쳤음이 편집후기로 확인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누가 그 부분의 집필 책임자로 명기되어 있는가'는 확정되었으나, '그 서술을 누가 발생시켰는가'는 여전히 『농수집』 동정에 걸려 있는 열린 문제로 남는다.

7. 소결과 검증 과제

이 장의 소결은 다음과 같다. 『천년사』의 편찬 조직은 간행사 문면으로 발행인(이종관)·간행위원장(이대선)·편집위원장(이용호)·파별 집필자(이용호·이준상·이태호)·심의(4인)·전문 감수(이종관)의 분업 구조로 확인되며, 9차 개정으로 1133면 명단·편집후기·판권지가 더해져 편찬 조직의 전모(심의위원장 흥세, 총정리 및 편집 태호, 교정 태세, 편별 집필자)와 판본 이력(초간 1999. 6. 1, 증보판 2002. 4. 30)까지 확정되었다. 따라서 발행인과 집필자는 문면상으로도 개념상으로도 구분된다는 명제는 유지되되, 이종관의 경우 두 지위를 겸하였음 — 발행인이면서 제1편·선부전서공파문중사의 집필자로 명기됨 — 이 새로 확인되었다. 그의 역할은 발행·전문 감수·오창문중 정착사 부분의 정리·1990년 간행사 저술·제1편 및 선부전서공파문중사 집필자 명기까지 1차 문면으로 확인되고, 명단상 편집(태호)·교정(태세) 항목에는 명기되어 있지 않으며, 회의 참석 여부는 현재까지 확인되지 않는다. 임종설과 '어제어필'은 『천년사』 본문에서 비로소 확인되나, 인용 문헌 『농수집』의 동정 전까지 그 기원은 열린 문제다.

검증 과제는 다음과 같다. ⑴ 『천년사』 권두·권말 부속문의 실물 확인 — 9차 개정으로 편찬 명단(1133면)·편집후기(1134~1135면)·판권지는 확보되었고, 발간사(존부 포함)만 남는다. ⑴′ 초간본(1999)과 증보판(2002)의 판본 대조 — 본고 인용 지면의 판본 귀속과 두 판본 간 문면 이동의 확인(신규). ⑵ 화수회 회의록·회보(특히 1997~1999년분)의 조사, ⑶ 파별 제출 원고의 현전 여부 확인, ⑷ 『농수집』 실물 동정, ⑸ 법조 인명록·관보의 李鍾寬 검색, ⑹ 대동보 서발문·편찬위원 명단 확인, ⑺ 『천년사』 전체와 선행 문헌의 전면 대조.

Ⅵ. 「가전충효 세수인경」의 수용사 — 대표 가훈으로의 정착 과정

1. 문제 설정

여덟 자가 '언제 기록되었는가'(기원)와 '어떻게 대표 가훈으로 자리 잡았는가'(수용)는 서로 다른 질문이다. Ⅲ장과 Ⅳ장이 앞의 질문을 다루었다면, 이 장은 뒤의 질문을 다룬다. 검토의 축은 매체이다. 여덟 자가 어떤 매체 — 족보 권두, 서원 문헌, 관찬 문서, 언론, 금석문, 간행물, 공공 조형물, 문중 게시 문서 — 에 언제부터 나타나는지를 연대순으로 정리하되, 각 항목의 확인 상태(실물 확인/문면 확인/보도 전재/미확인)를 구분한다.

2. 연대순 정리 — 확인되는 매체별 전개

시기 매체 확인되는 양상 발생 층위·확인 상태
1754 이전 족보 권두('구보') 여덟 자 인행, 필적 유래 무표기(갑술보 발문의 증언) ⑶ 족보 기록. 구보 동정 미해결
1574(잠정) 족보 권수 기사(삼조설) '세종대왕 수서'로 명문화 ⑶ 족보 기록. 원본 미확인
1509~1754 성립 서원 전승 문헌(행록) 수서 하사 서사의 문서화 ⑷ 문중·서원 전승. 문면 확보
1722 관찬 문서 유생 상소에 여덟 자 전문·'어필' 수록 ⑵ 후대 관찬. 원문 확보
1754 족보 권두(갑술보) 전거를 명시하고 세종의 수서로 판단, 모사 중모(重模) 수록 — 문중 차원 공식화 ⑶ 족보 기록. 발문 원문 확보
1937 신문·학술지 '세종대왕 어필 발견' 보도 — 문중 밖 대중 담론 진입 근대 보도. 확인
1975/76 서원 복원 전승 처소의 물리적 복원 현대. 연대 1년 차 미해결
1978~79 금석문(유허비) '친히 써 주시고'(수서 계열)로 새김. 실향 문중의 의례 처소 ⑸ 현대 문중. 문면 확보
1990 국역 간행물 『경수집』 국역본 간행사에 '친서 하사' 서술 ⑸ 현대 문중. 문면 확보
1997 이후 공공 조형물(대전 뿌리공원) 전의이씨 조형물(작품명 「인경」)의 후면 유래문에 임종·어필 서사와 '가훈' 규정 수록. 여덟 자 중 두 자가 작품명으로 채택 ⑸ 현대·공공 공간. 보도 전재로 문면 확인, 실사 필요
1999 종합 씨족사(『천년사』) "대대로 지켜나가는 가훈이 되었다" — '대표 가훈' 규정의 명시적 문면(현재 확인 상한) ⑸ 현대 편찬. 실물 확보
2005 이후 공적 기관 디지털 해제 유물(모사본) 해제, '모사로 여겨진다' 평가. 타 가문의 차용 서술 학계·공적 견해
2022 이후 문중 게시 문서 「우리 가훈의 내력」 — 앞면에 여덟 자 게시, '어제어필' 규정 ⑷ 문중 전승. 실물 확보

이 가운데 8차 개정에서 새로 확인한 항목은 공공 조형물이다. 대전 중구 뿌리공원(1997년 11월 개원)에 조성된 전의이씨 조형물은 작품명이 「인경(仁敬)」(조각가 천종권)으로, 여덟 자의 마지막 두 자가 성씨를 대표하는 공공 조형물의 표제로 채택된 사례다. 언론 보도가 전재한 후면 유래문은 이정간의 임종에 즈음하여 세종이 직접 거동해 여덟 자의 어필을 내렸고 이후 문중이 이를 가훈으로 삼고 있다는 취지로 서술하며, 별도 단락에는 여덟 자로 "정려(旌閭)한 후"라는 표현도 확인된다.77 이 문면은 세 가지 점에서 수용사의 자료가 된다. 첫째, 임종설 계열 서사가 문중 내부 간행물을 넘어 공공 공간의 게시문으로 정착했음을 보여 주고 — 이는 임종설이 『천년사』(1999) 간행을 전후한 시기에 문중 공식 서사로 유통되었음을 방증한다 — 둘째, 문중 외부의 방문객을 향해 '전의이씨의 가훈'으로 소개하는 매체가 늦어도 이 시기에 존재했음을 확정해 주며, 셋째, '정려'라는 표현은 실록·전승 문헌 어디에서도 확인되지 않는 이 게시문 특유의 변용으로, 매체를 옮길 때마다 표현이 재조립되는 양상의 추가 사례다. 다만 조형물의 설치 연대는 보도에 명시되지 않아, 뿌리공원 개원(1997) 이후라는 범위만 특정되며 실사로 확정할 사항이다.

3. 매체 유형별 검토와 미확인 영역

확인된 매체 유형을 정리하면, 족보 권두(늦어도 18세기 중반 이전의 '구보'부터, 1754년 이후는 모사 수록), 서원 문헌과 향사 공간(17~18 세기), 관찬 문서(1722, 등재 1회), 근대 언론(1937), 금석문(1979), 국역 간행물(1990), 공공 조형물(1997 이후), 종합 씨족사(1999), 문중 게시 문서(2022), 공적 기관 디지털 해제(2005 이후)이다. 다만 족보는 1754년 이후 각 판본(개수보·대동보)에서의 권두 수록 지속 여부가 판본별로 대조되지 않았다.

반면 다음 매체는 현재까지 본 조사에서 실물 또는 문면이 확인되지 않는다: ⑴ 현판(서원 강당·재실·종가), ⑵ 병풍, ⑶ 족자·서예 작품, ⑷ 문중 행사에서의 사용(시조 묘제·효정공 향사의 홀기·축문·의식문에서의 게시나 낭독), ⑸ 교육자료(화수회·종중의 청소년 교육, 숭조 교육 자료), ⑹ 회보·소식지류. 이들 매체에서의 사용이 없었다는 뜻이 아니라, 사용 여부와 시점을 판정할 자료가 아직 조사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조사 설계는 다음과 같다. 첫째, 송천서원 강당·재실의 현판을 실사하고 제작 연대와 낙관을 판독한다. 둘째, 화수회본부와 종가 소장의 병풍·족자를 목록화한다. 셋째, 시조 묘제와 효정공 향사의 홀기·축문을 검토하여 여덟 자의 게시·낭독 여부를 확인한다. 넷째, 화수회 회보와 교육자료를 연대순으로 수집한다. 다섯째, 각 파 종중 사무실과 재실의 게시물을 조사한다.

4. '대표 가훈' 인식의 형성 시점 — 층위적 판정

'현재 사용되는 대표 가훈이라는 인식은 언제부터 확산되었는가'라는 질문에 단일 시점으로 답하는 것은 사료가 허용하지 않는다. 매체 기준으로 층위화하면 다음과 같다. ⑴ 족보 권두 게시의 관행은 갑술보 발문이 증언하는 '구보' 단계, 즉 늦어도 18세기 중반 이전으로 소급된다(그 구보의 동정이 이루어지면 더 소급될 수 있다). ⑵ 문중 차원의 공식화는 전거를 명시하고 모사를 수록한 1754년 갑술보가 결절점이다. ⑶ 문중 밖 공적 담론 진입은 관찬 등재 기준 1722년, 대중 담론 기준 1937년 보도이다. ⑷ '가훈'이라는 명시적 규정의 문면은 현재 확인되는 범위에서 1999년 『천년사』 557면("대대로 지켜나가는 가훈이 되었다")이 상한이며, 공공 공간에서 '전의이씨의 가훈'으로 소개한 문면은 뿌리공원 조형물 유래문(1997년 이후 설치, 문면 확인은 2011년 보도)으로 확인된다. 그 이전 단계의 문헌(행록·발문·상소)은 여덟 자를 하사의 서사로 전할 뿐 '가훈'이라는 규정어를 쓰는지 여부가 원문 기준으로 확인되지 않으므로, 규정어의 등장 시점은 별도의 문면 대조 과제로 남는다. 요컨대 수용은 단일 사건이 아니라, 족보 권두 → 서원 → 관찬 등재 → 근대 보도 → 금석문 → 국역 간행물 → 공공 조형물 → 종합 씨족사 → 문중 게시 문서로 매체를 갈아타며 누적된 과정이며, 각 단계의 확인 상태를 구분하여 서술할 때에만 정확하다.

Ⅶ. 「가전충효 세수인경」 전승계통도(Stemma Codicum)의 복원

1. 장의 목적과 방법 — 사본 계통학의 원용

이 장은 앞의 Ⅲ~Ⅵ장에서 개별적으로 검토한 문헌들을 하나의 계통 안에 재배치한다. 방법은 서양 문헌학에서 사본의 필사 계보를 복원하는 데 쓰여 온 계통도(stemma codicum)의 원리를 원용하되, 그 대상을 필사본의 자형(字形) 계보가 아니라 하나의 서사 — '세종이 여덟 자를 써서 내렸다' — 가 문헌에서 문헌으로 전승·변형되어 간 계보로 옮긴 것이다.78 즉 어느 문헌이 어느 문헌을 인용하였고, 어느 문헌에서 어떤 요소가 처음 등장하며, 어느 지점에서 용어가 분기·격상되는지를 하나의 도면 위에 복원한다.

복원의 원칙은 다음 넷이다. 첫째, 인용 방향이 문면으로 확증된 관계(예: 갑술보 발문의 행록 인용)와 요소 공유에 의한 개연 추정(예: 1722년 상소와 행록의 관계)을 구분하여 표기한다. 둘째, 원본이 확인되지 않은 문헌(만력보·숭정보 등)은 그때마다 '원본 미확인'을 명기하며, 그 마디는 잠정적이다. 셋째, 계통도는 '현재까지 확인된 사료'만으로 그린 잠정 복원이므로, 만력보·숭정보 원본이나 서원 소장 행록 원본이 발견되면 해당 마디만 교체·보완하면 되는 열린 구조로 설계한다. 넷째, 계통도의 어느 마디도 어필 하사의 사실 여부에 대한 판정을 함의하지 않는다. 계통도가 복원하는 것은 기록의 계보이지 사건의 실재 여부가 아니다.

2. 전승 계통도

현재까지 확인된 사료에 의한 전승 계통은 다음과 같이 복원된다. 확증된 인용 관계는 '⇒(확증)', 개연 추정은 '→(개연)'으로 구분한다.

[제1층위: 15세기 당대·근접 사료 --- 여덟 자·어필 기록의 부재]

  『세종실록』 교서(1432.4.25) · 사은 전문(1432.5.3) · 졸기(1439)
      ↓
  「정대부인김씨묘표」(1445, 이양간 찬) --- 가범 칭송, 여덟 자 없음
      ↓
  신도비(1456, 이서장 찬) --- 褒書·超陞·几杖·酒樂만 열거(전문 판독)
      ↓
  『경수집』 하시(성립 1432 전후, 초간 1509) --- 확인 범위에 여덟 자 없음
      ↓
  ····· (약 120년의 문헌 공백) ·····

[제2층위: 족보·서원·관찬 --- 귀속의 형성과 용어의 병존]

  만력보 「삼조설」(1574, 원본 미확인) : '세종대왕 手書'(보고)
      ←(부기) 청강공 이제신의 手書
      ↓ (개연)
  숭정보(1634) : 수록 양상 미확인
      ↓ (개연)
  「효정공 송천서원 행록」(성립 1509~1754) : '手書' 용어
      ├─→(개연: 청주 유림 전승의 공유)
      │      『승정원일기』 1722.7.18 청주 유생 상소 : '御筆' 용어
      │       (관찬 기록상 최초, 스스로 전승의 인용임을 자술)
      └─⇒(확증: 문면 인용 "世宗大王手書賜...八字")
             갑술보 이징국 발문(1754) : '手書·特賜', 권두에 重模

  ※ 『승정원일기』 1773.4.3(이징성 궤장 하사) : 어필 언급 없음
     --- 조정이 주체가 된 서사의 준거는 일관되게 궤장

[제3층위: 근대의 공표]

  1937 이극로의 족보 권두 실물 확인
      ⇒ 동아일보 보도(「세종대왕 어필 발견」) · 『한글』 5호
        --- '御筆'의 표제화·대중 용어화

[제4층위: 현대의 정리와 격상]

  1990 『경수집』 국역본 간행사(이종관) : '親書 下賜'
      ↓
  1999 『전의예안이씨천년사』 초간 : 임종 문병 · '御製御筆'
      ←(인용) 『농수집(聾叟集)』 '親製御筆' (실물 동정 미상)
      ←(전재) 행록·신도비문·묘표·유허비명·1990 간행사
      ↓
  2002 『천년사』 증보판 (초간과의 문면 이동 미확인)
      ↓
  현대 문중 자료 : 「우리 가훈의 내력」(2022 이후, '御製御筆' 계승)
                  · 뿌리공원 조형물 유래문(임종설 계열 + '旌閭')

이 계통도가 보여 주는 구조적 특징은 셋이다.

첫째, 단절이다. 제1층위와 제2층위 사이에는 약 120년의 문헌 공백이 있고, 이 공백을 사이에 두고 여덟 자에 관한 기록의 유무가 갈린다. 공백 이전의 어느 문헌에서도 여덟 자는 확인되지 않고, 공백 이후의 문중·유림 계통 문헌에서 비로소 나타난다.

둘째, 분기이다. 제2층위에서 같은 서사가 두 용어 계통으로 문서화되었다. 문중·서원 계통(행록·갑술보 발문)은 일관되게 '수서(手書)'를, 유림의 관찬 진입 계통(1722년 상소)은 '어필(御筆)'을 쓴다. 두 계통은 노래자 고사·여덟 자 전문·사연(賜宴) 등 요소를 공유하므로 같은 청주 유림·문중 전승의 두 갈래 문서화로 볼 개연성이 있으나(Ⅹ장 ⑥항), 인용 방향이 문면으로 확증된 간선은 행록 ⇒ 갑술보 발문 하나뿐이다.

셋째, 합류와 격상이다. 근대 이후 두 용어 계통은 1937년 보도의 표제화를 거치며 '어필'로 수렴하고, 현대 정리 단계(1990 '친서' → 1999 '어제어필')에서 최상급 표현으로 격상된다. 격상의 각 마디는 원문 층위에서 서로 구분되며(Ⅲ장·Ⅳ장), 상위 표현이 하위 표현을 소급하여 대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본고의 용어 원칙이다.

3. 문헌별 기본 정보와 인용 관계

계통도의 각 마디에 해당하는 문헌의 기본 정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사료 등급은 Ⅰ장 2절의 구분에 따른다.

문헌(작성 시점) 작성자 사료 등급 작성 목적· 관찰 조건 인용 전거(문면 확인 기준)
세종실록 포창 교서 (1432.4.25) 1급 포창 교서 / 당대 기록
세종실록 사은 전문 (1432.5.3) 이정간 1급 사은 / 당사자 교서에 대한 응답
세종실록 졸기 (1439.9.27) 사관 1급 졸기 / 당대 1432년 포장의 회고
정대부인김씨묘표 (1445) 이양간(아들) 1급에 준함 묘표 / 가족·당대 —
신도비(1456) 이서장(손자) 2급(사건 근접) 신도비명 / 가족·근접 세대 교서 내용(褒書·几杖 등) 반영
경수집 하시(성립 1432 전후, 초간 1509) 권홍·맹사성·황희· 유관 등 2급에 준함(판본 층위 복합) 축하 시문 / 당대 성립·후대 판본 교서·궤장·주악을 노래
만력보 삼조설(1574) 이제신 3급(원본 미확인) 족보 권수 기사 / 사후 142년 미상(원본 미확인)
숭정보(1634) 미상 3급(미확인) 족보 / 사후 미상
서원행록(성립 1509~1754) 미상(서원·문중) 4급 행록 / 사후 교서 고사(崔鄲·徐積) 반영, 경수시서 간행 언급
승정원일기 상소 (1722.7.18) 청주 유생 박수함 등 (승정원 수록) 2급(관찬 수록, 내용은 전승 인용) 사액 청원 / 사후 283년 ’州人至今艶稱之’로 전승 인용임을 자술
갑술보 발문(1754) 이징국 2급(원문 확보) 족보 발문 / 사후 행록·청강공 수서를 명시 인용(확증)
승정원일기 (1773.4.3) 승정원 1급(1773년 사실) 궤장 하사 기록 / 당대(1773) — (어필 언급 없음)
동아일보·한글 5호 (1937) 이극로·기자 5급 보도·학술지 / 실물 확인 족보 권두 실물, 행록 기록
경수집 국역 간행사 (1990) 이종관 5급 간행사 / 사후 종전 문중 전승
천년사 초간(1999)· 증보판(2002) 화수회(주필 이태호 외, Ⅴ장 참조) 5급 씨족사 / 사후 행록·신도비문·묘표·유허비명· 1990 간행사 전재 + 농수집 인용
우리 가훈의 내력 (2022 이후) 문중 3급(문중 전승) 내부 문서 / 사후 승정원일기 1722 기사 확인, 1999 계열 서술 계승

4. 전승 요소 대조표 — 문헌별 유무 판정

전승을 구성하는 핵심 요소 여섯 가지 — ⑴ 여덟 자 자체, ⑵ 세종 수서(手書), ⑶ 어필(御筆), ⑷ 어제어필(御製御筆), ⑸ 임종 문병, ⑹ '가훈'이라는 명시적 규정 — 의 문헌별 유무를 판정하면 다음과 같다. ○는 문면으로 존재가 확인됨, ×는 문면으로 부재가 확인됨, ▲는 보고·전문(傳聞)에 의한 잠정(원본 미확인), ―는 판정 불가(문헌 미확인 또는 해당 없음)를 뜻한다.

문헌 여덟 자 手書 御筆 御製 御筆 임종 문병 가훈 규정 이 문헌에서 최초로 확인되는 요소
실록 교서·전문(1432) × × × × — × (특진·궤장·교서의 사실)
실록 졸기(1439) × × × × × × —
묘표(1445) × × × × — × —
신도비(1456) × × × × × × —
경수집 하시(확인 범위) × × × × — × —
만력보 삼조설(1574) ▲ ▲ — — — — 세종 귀속(보고상 최초, 잠정)
숭정보(1634) — — — — — — —
서원행록(1509~1754) ○ ○ × × × × 수서 서사의 문면(원문 확인 기준 최초)
승정원일기 상소(1722) ○ × ○ × × × ‘御筆’ 용어(전근대 유일), 관찬 문서 등재
갑술보 발문(1754) ○ ○ × × × × 문중 차원의 공식화, 인용 전거의 명시
승정원일기(1773) × × × × — × (조정 준거가 궤장임을 방증)
1937 보도·한글 5호 ○ — ○ × × × ’어필’의 표제화·대중화
1990 국역 간행사 ○ ○(親書) — × × — ’친서 하사’의 현대 공식 문서화
천년사(1999) ○ ○ ○ ○ ○ ○ 어제어필·임종 문병·‘가훈’ 규정(모두 확인 상한)
우리 가훈의 내력 (2022 이후) ○ — ○ ○ — ○ 1722년 기사의 재확인

5. 전승 요소 변화표 — 최초 등장 연표

위 대조표를 요소 기준으로 뒤집으면, 각 요소가 어느 문헌에서 처음 확인되는지의 연표가 된다. '원문 확인 기준'과 '보고상 상한(원본 미확인 포함)'을 구분한다.

전승 요소 원문 확인 기준의 최초 문헌 보고상 상한(잠정)
여덟 자 자체 서원행록(성립 1509~1754) 및 승정원일기(1722) 만력보 권수(1574) 및 갑술보 발문이 증언하는 ‘구보’ 권두 인행(판본 미상)
세종 귀속·手書 서원행록(성립 1509~1754) 만력보 삼조설(1574)
御筆 승정원일기 1722.7.18 상소(전근대 유일) —
御筆의 대중화 동아일보·한글 5호(1937) —
親書 경수집 국역본 간행사(1990) —
御製御筆 천년사 557면(1999) 농수집 ‘親製御筆’(인용 정확 시, 실물 동정 미상)
임종 문병 천년사 557면(1999) 농수집(동정 미상)
‘가훈’ 명시 규정 천년사(1999, 확인 상한) —
대표 가훈 인식 단일 시점 아닌 층위(Ⅵ장 4절): 족보 권두 관행(18세기 중반 이전)→공적 담론(1722·1937)→ 명문화(1999) —

이 연표가 확정해 주는 것은 요소들의 등장 순서이지 각 요소의 발생 시점이 아니다. 모든 '최초 확인'은 '최초 발생'이 아니라 '현존 사료상 최초 확인'이며, 원본 미확인 문헌의 동정에 따라 각 상한은 언제든지 소급될 수 있다.

6. '사료의 침묵'의 방법론적 지위

계통도 제1층위의 판정 — 15세기 사료에서 여덟 자가 확인되지 않는다 — 는 이른바 침묵 논증(argumentum ex silentio)에 해당하므로, 그 방법론적 지위를 별도로 명확히 해 둘 필요가 있다.79

원칙은 다음과 같다. 침묵은 그 자체로 증거가 아니다. 어떤 문헌이 어떤 사항을 기록하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 그 사항이 없었다고 추론할 수 없다. 기록되지 않은 이유는 무수히 많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학 방법론에서 침묵이 하나의 역사적 정황으로 승격되는 조건이 논의되어 왔는데, 대체로 다음 세 가지로 요약된다. ⑴ 해당 문헌이 그 사항을 기록할 것으로 강하게 기대되는 장르·목적의 문헌일 것, ⑵ 해당 문헌이 온전하게 전하여 일실·산삭의 가능성이 통제될 것, ⑶ 서로 독립적인 복수의 문헌이 동일한 침묵을 보일 것.

본 사안에 적용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조건 ⑴에 대하여. 사은 전문은 받은 은전에 감사하는 문서이고, 신도비문은 은전의 세목을 과시적으로 열거하는 장르이며, 경수집 하시는 당대 명공거경들이 은전의 세목을 경쟁적으로 노래한 축하시이다. 어필 하사가 있었다면 기록될 것으로 가장 강하게 기대되는 자리들이다. 특히 신도비문은 褒書·超陞·几杖·酒樂이라는 세목을 실제로 열거하면서 여덟 자만을 빠뜨리고 있다. 둘째, 조건 ⑵에 대하여. 실록 세 기사는 관찬 데이터베이스로 전문이 확인되고, 신도비문은 7차 개정에서 서·계보·명의 전 범위가 판독되었으며, 묘표도 원문·역문이 확인되었다. 다만 경수집은 초간 당시 이미 영연시 57수 중 40수가 일실된 층위 복합 문헌이므로 이 조건을 부분적으로만 충족하며, 그 침묵의 무게는 그만큼 할인되어야 한다. 셋째, 조건 ⑶에 대하여. 실록(관찬)·묘표(가족)·신도비(가족)·경수집(당대 관료들)이라는 서로 다른 작성 주체의 문헌들이 동일한 침묵을 보인다.

따라서 15세기 사료의 침묵은 단순한 우연적 공백이 아니라 조건을 상당 부분 충족하는 하나의 역사적 정황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정황은 정황일 뿐이다. 이 침묵은 '어필 하사가 없었다'는 단정의 근거가 될 수 없으며, 본고는 이를 단정의 근거로 사용하지 않는다. 침묵이 확정해 주는 것은 사건의 부재가 아니라 15세기 문헌화의 부재가 현재까지 확인된다는 사실까지이다. 이는 본고의 결론 — 어필 하사 자체의 사실 여부는 현재까지 확인도 부정도 되지 않는다 — 과 정합한다.

7. 소결

이 장의 계통도와 대조표는 새로운 사실을 추가하지 않는다. Ⅲ~Ⅵ장에서 개별적으로 확인된 사실들을 하나의 계보 위에 재배치했을 뿐이다. 그러나 이 재배치를 통해 비로소 드러나는 것이 있다. 전승은 단일한 직선이 아니라 단절(120년의 공백), 분기(手書/御筆의 두 용어 계통), 합류와 격상(근대 이후의 수렴과 御製御筆로의 상승)이라는 구조를 가진 계통이며, 그 계통의 각 마디는 확증된 인용 관계와 개연 추정, 원문 확인과 보고상 잠정이 엄격히 구분된 상태로 복원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이 계통도는 닫힌 결론이 아니라 열린 틀이다. 만력보·숭정보 원본, 서원 소장 행록 원본, 『농수집』 실물이 확인되는 순간 해당 마디를 교체·보완하면 되고, 그때에도 틀 자체는 유지된다.

Ⅷ. 근현대 문중 운영과 갈등 구조의 변화

[게재 보류] 이 장은 근현대 문중 운영과 갈등 구조를 다루는 장으로, 현재 관련 절차가 진행 중인 사안과 실명 문서 분석을 포함한다. 이에 따라 공개판에서는 게재를 보류하며, 절차 종결 후 별편으로 공개할 예정이다. 장 번호는 전체판과의 대응을 위해 유지한다. 본 장의 서술 원칙(사실·정황·증언·미확인의 구분, 동기 단정의 배제)은 일러두기에 요약되어 있다.

Ⅸ. 연대기 정리

연도 사항
1360 이정간 출생. 전의이씨 시조 이도(李棹)의 10대손(세계 산정 방식에 따라 11세로 표기되기도 함).
1432. 4. 25 세종, 이정간을 자헌대부 중추원사로 특서하고 궤장 하사, 효행 포창 교서. [세종실록]
1432. 5. 3 이정간, 사은 전문을 올림. 어필 언급 없음. [세종실록]
1439 이정간 졸. 시호 효정(孝靖).
1456 신도비 건립. 세종 포장 대목(천년사 570면 발췌로 원문 확인)에 褒書·超陞·几杖·酒樂만 서술, 어필 언급 없음. 전문 대조는 후속 과제.
1476 성화초보(이하 작성, 초보 형태, 원본 부전).
1509 『경수집』 초간(중종 4, 현손 전평군 이계복). 초간 당시 이미 영연시 57수 중 40수 일실.
1509~1754 사이 「효정공 송천서원 행록」 성립(경수시서 간행 언급으로 상한, 갑술보 발문의 인용으로 하한 확정). '世宗大王手書賜…八字' 문면 확보(천년사 수록 전사).
1574 만력보 간행(편찬 1574, 서발 1575). 탁·해수·제신 3인 주관, 안로 협력, 목판본 단권(부정공파 연혁). 권수 삼조설에 '세종대왕 수서' 기록(보도 근거). 現無傳 --- 갑술보 수권 전재 서발문으로 간접 확인 가능.
1634 숭정보 간행. 구준·명준 형제 및 영천군수 이후기 주관, 목판본 전 2권, '현전 최고본·극희귀'(부정공파 연혁). 여덟 자 수록 양상 미확인 --- 실물 소재 확인이 최우선 실사 과제.
1682 『경수집』 재간(숙종 8, 외손 정시성·방8대손 이만봉).
1695?/1706? 청주(청원군 옥산면 환희리 송천마을)에 이정간 등 7현 사우(송천서원) 창건. 해제류와 천년사 573면은 1695년(숙종 21 을해; 천년사의 서기 병기 1696은 환산 오기) 창건·1711년 사액이라 하나, 1722년 상소는 丙戌年間(1706 추정) 창건·사액 미수로 자술. 연대 불일치, 재검토 필요.
1722. 7. 18 청주 유학 박수함 등, 7현 사우 사액 및 이제신·최석정·이인혁 추배 청원 상소. 이정간 대목에 '어필로 家傳忠孝世守仁敬 여덟 큰 글자를 써서 포창' 진술 — 관찬 기록상 '어필' 표현의 최초 확인 사례. 비답은 예조 품처. [승정원일기]
1723 송천서원에 이제신 등 추배(경종 3).
1754 갑술보 중수. 이징국 발문(원문 확보): 구보 권두 8자 인행·필적 유래 무표기 → 서원행록·청강공 수서를 전거로 세종의 '手書·特賜'로 판단, 권두에 모사(重模) 수록. 원문에 御筆 표현 없음. 실물 추정본이 장서각 소장(K2-1782, 이덕용 등 편, 목활자본 10권 10책)으로 확인, 원문이미지 공개 --- 전사본과의 대조는 미완.
1773. 4. 3 영조, 이정간 10대손 전 오위장 이징성 소견, 궤장 하사, 지중추부사 가설 단부. 어필 언급 없음. [승정원일기]
1871 송천서원 훼철(서원철폐령).
1918 『경수집』 3간(17대손 이학로·18대손 이능세 등). 세 차례 간행 과정에서 세종의 褒書와 행장을 앞뒤에 추록, 일실 시문 일부를 후손의 글로 보충.
1937 이극로, 이정로 가 소장 족보에서 여덟 자 확인. 동아일보 「세종대왕 어필 발견」 보도, 『한글』 5호 기록.
1975/1976 송천서원, 행정 서편 효정공 송천별서 구지에 복원(천년사 1975년, 해제류 1976년).
1990. 2 『경수집』 국역 4간. 간행사(전서공파종회장·효정공 19대손 이종관): 여덟 자 '친서 하사' 후 1432년 4월 특서로 서술.
1997. 5. 30 화수회 제22차 정기총회에서 『전의예안이씨천년사』 간행 가결. 24개월의 편찬 착수.
1997. 11 이후 대전 중구 뿌리공원 개원. 이후 전의이씨 조형물 「인경(仁敬)」 설치(설치 연대 미확인). 후면 유래문에 임종설 계열 어필 서사와 '가훈' 규정 수록(문면은 2011년 보도 전재로 확인, 실사 필요).
1998. 11. 1 주필 이태호, 『천년사』 원고 집필 개시(편집후기. 1999. 6. 1 각필, 만 7개월).
1999. 5 『천년사』 머리말(이종관)·간행사(이대선) 작성.
1999. 6. 1 『전의예안이씨천년사』 인쇄·발행(판권지. 화수회본부, 발행인 이종관, 편집인 이대선, 편찬 이태호). 효정공 관련 절(555면 이하, 573~576면 행록 절 — 행록 한문 전문 수록)과 신도비명(860면) 등 수록. 본문 557면에 임종 문병·'어제어필(御製御筆)' 서사 등장(572면은 그 전거로 『농수집』을 인용). 집필 분담: 제1편 종관, 제2~5편 공동집필(희옥·종원·용호·태호), 제6편 선부전서공파문중사 대표집필 태호·집필 종관(1133면 명단). 같은 날 주필 편집후기 작성.
2002. 4. 30 『전의예안이씨천년사』 증보판 발행(판권지). 초간본과의 문면 이동 여부는 미확인(판본 대조 과제).
2005 천혜봉, 「세종대왕어사희우정효령대군방문」 서첩 공개. 필체 비교 준거 등장.
2022. 10 용성(중파 29세) 종인, 승정원일기 1722년 기사 확인. 문중 문서 「우리 가훈의 내력」에 발견 경위 부기, 여덟 자를 '어제어필'로 규정.
현재 국가의 어필 공인 없음. 공적 기관 해제는 '모사로 여겨진다'로 서술.

Ⅹ. 핵심 질문에 대한 검토 결과

① 여덟 자가 가장 먼저 등장하는 문헌

여덟 자 자체의 최초 수록 문헌은 확정할 수 없다. 갑술보(1754) 발문은 여덟 자가 '구보' 권두에 이미 인행되어 있었다고 증언하나(원문 확보), 그 구보가 어느 판본인지 동정되지 않았다.80 현재까지 확인되는 범위에서 작성 시점이 특정되는 가장 이른 관련 기록은 만력보(1574)의 삼조설 내지 그 뒤에 부기된 청강공의 수서이다(원본 미확인, 잠정).

② 세종 어필이라는 기록의 최초 등장

현재까지 확인되는 범위에서 1574년 만력보 삼조설의 '세종대왕 수서' 기록이 가장 이르다(잠정, 원본 미확인). 이는 사건 시점으로부터 약 142년 뒤이다. 원문이 직접 확인되는 기록으로 한정하면 『승정원일기』 1722년 7월 18일 기사가 현재까지의 상한이다.81

③ '어필'이라는 표현의 등장

원문이 확인되는 범위에서, '어필(御筆)'의 전근대 용례는 1722년 유생 상소(승정원일기 수록)가 유일하다. 서원행록(6차 개정에서 한문 전문 확보)과 갑술보 발문 원문의 용어는 모두 '수서(手書)'·'특사(特賜)'이며, 발문에 '어필'을 귀속시킨 것은 현대 국역 단계의 보충으로 확인되었다. '어제어필(御製御筆)'은 종전 판단(2022년 이후 문중 문서 단계의 부가)을 수정하여, 늦어도 1999년 『천년사』 본문(557면)에 등장하며 그 연원은 『천년사』가 인용한 문집('친제어필', 서명 판독 미상)으로 소급될 가능성이 확인되었다. 수서→어필(1722, 관찬)→친서·어필(1990 간행사·현대 국역)→어제어필(늦어도 1999→2022 이후)로 이어지는 용어의 격상은 전승의 제도화·현대적 정리 과정을 반영하되, 각 단계의 용어는 원문 기준으로 엄밀히 구분되어야 한다.

④ 효행 기록과 가훈 기록의 동시성 여부

동시대 기록이 아니다. 효행 포창은 1432년 당대 관찬 사료로 확인되는 반면, 여덟 자의 세종 귀속은 현재까지 확인되는 범위에서 1574년 이후의 기록에서 나타난다.

⑤ 후대에 덧붙여진 내용의 유무

'덧붙여졌다'고 단정하는 것은 사료가 허용하는 범위를 넘는다. 확인 가능한 것은 (1) 15세기 사료(실록 세 기사·묘표·신도비 전문·확인된 하시)에 어필 기록이 없다는 것, (2) 16세기 후반 이후의 기록에서 비로소 나타난다는 것, (3) 인물 정보(나이 등)와 수식('유일한 필적' 등)이 전승 과정에서 증폭되었다는 것이다. 어필 하사가 실제 있었으나 기록되지 않았을 가능성과, 후대에 귀속이 형성되었을 가능성 중 어느 쪽도 현재의 사료로는 배제되지 않는다.

⑥ 문헌 간 문장 비교

Ⅳ장의 표와 같이, 당대 사료(교서·사은 전문·졸기·묘표·신도비 전문·확인된 경수집 하시)는 궤장·특진·교서(褒書)·주악만을 말하고, 후대 문중·서원 기록으로 갈수록 수서→어필→어제어필로 표현이 구체화·격상된다. 갑술보 발문 스스로 '구보에는 필자 설명이 없었다'고 증언한 점, 그리고 행록이 교서의 고사(崔鄲·徐積)까지 정확히 알면서도 교서에 없는 수서 하사를 서사의 서두에 배치한 점이 문헌 간 차이의 핵심이다. 상소(1722)와 행록은 노래자 고사·여덟 자 전문·사연(賜宴)이라는 공통 요소를 공유하되 용어(御筆/手書)를 달리하므로, 같은 청주 유림·문중 전승 계통 안의 두 갈래 문서화로 볼 개연성이 있다.

⑦ 승정원일기 기록의 성격 — 기존 문헌의 인용인가, 독립 기록인가

독립 기록이 아니라 기존 전승의 인용이다. 검색어 '李貞幹'에 의한 전수 검색 결과 관련 기사는 두 건으로 확정되었다.82 1722년 7월 18일 기사는 청주 유생들의 사액 청원 상소를 수록한 것으로, 어필 대목은 상소 스스로 '고을 사람들이 지금까지 일컫는다'고 밝힌 지역·유림 전승의 진술이며, 비답도 사실 확인이 아닌 통상적 품처 지시였다.83 1773년 4월 3일 기사는 후손 이징성에 대한 궤장 하사 기록으로 어필을 언급하지 않는다.84 세종대 승정원일기 자체가 현존하지 않으므로 당대의 독립 기록은 구조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85 요컨대 『승정원일기』에서 어필을 언급하는 유일한 기사는 전승의 인용이고, 조정이 주체가 된 기사(1773)의 준거는 궤장이었다. 다만 1722년 기사는 어필 전승이 관찬 문서에 등재되어 공적 담론으로 진입한 시점을 확정해 주는 사료적 가치를 갖는다. 보조 검색어에 의한 추가 검색과 사액 시행 등 후속 처리 기사의 추적은 남은 과제이다.

⑧ 조선 후기 이전의 동일 내용 존재 여부

조선 전기(15세기) 사료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조선 중기(1574, 만력보)의 기록이 보고상의 상한이고(잠정), 원문이 확인되는 상한은 조선 후기 초입인 1722년이다.

⑨ 근대 편찬자의 역할

1937년 이극로의 작업은 기존 자료(서원행록의 기록 → 족보 권두의 실물)를 확인·공표한 것으로, 새로운 전거를 추가한 것이 아님이 확인된다. 다만 '발견'이라는 보도 프레임이 이후의 대중적 과장 서술('유일한 세종 필적' 등)의 출발점이 된 측면이 있다. 현대의 문중 정리 단계에서는 1990년 『경수집』 국역본 간행사(이종관)가 '친서 하사' 서사를 공식 문서화하였고, 1999년 『천년사』 본문에 임종 문병·'어제어필(御製御筆)' 서사가 등장하였다(전거로 인용된 문집의 동정 필요). 2022년 이후의 문중 문서(「우리 가훈의 내력」)는 기본적으로 기존 자료의 확인·정리(승정원일기 기사 확인 포함)이며, 그 '어제어필' 표현은 1999년 공식 씨족사 계열 서술의 계승으로 확인된다. 원사료에 없는 표현 요소의 최초 부가 시점을 확정하는 일은 『천년사』가 인용한 문집의 동정과 근대 이후 판본별 문면 대조로 검증할 후속 과제이다.

이하 ⑩~⑰은 8차 개정에서 신설한 편찬·수용 관련 질문이다. 상세한 분석은 Ⅴ장·Ⅵ장에 있으며, 여기서는 답만 요약한다.

⑩ 『천년사』에서 최초로 확인되는 문장은 무엇인가

557면의 임종 문병·어제어필 문장이다(Ⅴ장 6절). 다만 '최초로 추가되었다'가 아니라 '최초로 확인된다'로 한정한다. 572면이 그 전거로 『농수집』을 인용하므로, 창안의 주체와 시점은 그 동정 전까지 특정할 수 없다.

⑪ 이전 문헌에 없는데 『천년사』에서 새롭게 등장한 표현은 무엇인가

임종 문병설, '어제어필(御製御筆)'(인용 문헌 표현은 '친제어필'), 그리고 실록과 다른 세부 일자 배열의 세 요소이다(Ⅴ장 6절).

⑫ 『천년사』는 어떤 문헌을 그대로 인용했고 어떤 부분을 새롭게 편집했는가

전재 층위(행록·신도비문·묘표·유허비명·1990 간행사)와 본문 서술 층위(555~572면 일대)로 구분된다. 전재 층위는 원문 보존의 기능을, 본문 서술 층위는 종합·편집의 기능을 수행하였고, 새 요소는 후자에서만 확인된다(Ⅴ장 5절의 표와 도식).

⑬ 발행인의 역할과 집필자의 역할은 어떻게 구분되는가

간행사 문면 자체가 구분한다. 집필은 이용호(상조사·백파)·이준상(중파)· 이태호(계파), 발행과 전문 감수는 이종관, 부분 정리는 579면에 별도 명기(오창문중 정착사는 종관)된다. 발행인과 집필자는 동일 개념이 아니다. 다만 9차 개정에서 확보된 1133면 명단은 이종관이 제1편의 집필자이자 제6편 선부전서공파문중사의 '집필'(대표집필 태호와 병기)로도 명기되어 있음을 보여 주므로, 개념의 구분과 별개로 한 사람이 두 지위를 겸할 수 있고 실제로 겸하였음이 확인된다. 그럼에도 개별 절·문장 단위의 작성자를 특정할 자료(분담 경계·제출 원고·편집 기록)는 현재까지 확인되지 않는다(Ⅴ장 2~4절).

⑭ 『천년사』 이후 문중에서 표현이 어떻게 변화했는가

「우리 가훈의 내력」(2022 이후)이 '어제어필'을 계승하였고, 공공 조형물 유래문(문면 확인 2011)은 임종설 계열 서사에 '정려(旌閭)'라는 독자적 표현을 더하였다. 즉 『천년사』 계열 서술의 계승과 매체별 변용이 병행한다(Ⅲ장 7절, Ⅵ장 2절).

⑮ '세종 어필'과 '세종 수서'라는 표현은 언제부터 혼용되었는가

원문 층위에서는 혼용이 아니라 병존이다. 수서(手書)는 행록과 갑술보 발문(1754)의 용어이고, 어필(御筆)은 1722년 상소(관찬 수록)의 용어로, 18세기 전반에 서로 다른 문서 계통에서 병존하였다. 수서 문헌에 '어필'을 귀속시키는 혼용은 현재 확인되는 범위에서 현대 국역 단계(갑술보 발문 국역 등)에서 나타나며, 1937년 보도가 '어필'을 표제화하면서 대중 용어로 고정되었다(Ⅲ장 3절, Ⅳ장).

⑯ '어제어필'이라는 표현은 최초로 어느 문헌에서 등장하는가

현재 확인되는 최초 문헌은 『천년사』(1999) 557면이다. 572면의 인용이 정확하다면 『농수집』의 '친제어필'로 소급될 수 있으나, 그 문집의 동정 전까지 상한은 특정할 수 없다(Ⅲ장 6절 나항, Ⅴ장 6절).

⑰ 현재 사용되는 대표 가훈이라는 인식은 언제부터 확산되었는가

단일 시점이 아니라 층위로 답한다. 족보 권두 게시 관행은 늦어도 18세기 중반 이전('구보' 증언), 문중 차원 공식화는 1754년, 공적 담론 진입은 1722년(관찬)과 1937년(대중), '가훈'이라는 명시적 규정의 확인 상한은 1999년 『천년사』이며, 공공 공간의 소개 문면은 뿌리공원 조형물(1997년 이후)로 확인된다(Ⅵ장 4절).

Ⅺ. 전승 과정 분석

이상의 검토를 종합하면 전승은 네 단계로 층위화된다.

제1단계(15세기): 사실의 층위. 세종의 특진·궤장·교서라는 이례적 포장이 실록으로 확인된다. 이 사실 자체가 이후 모든 전승의 핵이다. 왕의 특별한 은전을 받은 가문이 그 기억을 물적·문자적 형태로 보존하려는 동기는 자연스럽다.

제2단계(16세기 후반): 귀속의 층위. 족보 권두의 무기명 여덟 자가 '세종의 수서'로 명문화된다(만력보 삼조설, 잠정). 이 시기는 사화·전란 이전의 족보 정비기로, 가문의 기억이 문자로 고정되는 국면이다. 삼조설 작성자 이제신이 이정간의 6대손이라는 점에서 이는 가문 내부 전승의 기록화로 볼 수 있다.

제3단계(17~18세기): 제도화의 층위. 청주 유림의 사우 건립과 『서원행록』, 1722년 사액 청원 상소를 통한 조정 상달, 이듬해의 추배, 그리고 갑술보(1754)의 권두 모사 수록으로 이어지며 어필 이해가 유림·문중의 공식 입장으로 정착한다. 특히 1722년 상소는 어필 전승이 관찬 기록에 처음 등재된 지점이자, 삼조설 작성자 이제신의 추배를 함께 청함으로써 전승 담지 집단의 연속성을 보여주는 결절점이다. 다른 한편 1773년 영조가 이정간의 10대손 이징성에게 궤장을 하사한 기사는 어필을 언급하지 않아, 조정의 공식 서사(궤장 중심)와 유림·문중의 전승(어필 중심)이 같은 시대에 서로 다른 층위로 병존하였음을 보여 준다. 갑술보 발문이 전거를 명시하며 판단 과정을 남긴 것은, 당시 편찬자들이 나름의 고증 절차를 거쳤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 고증의 전거가 결국 16세기 이후의 문중·서원 기록이었음을 드러낸다.

제4단계(근대 이후): 공표와 증폭, 그리고 재확인의 층위. 1937년의 확인·보도로 전승이 문중 바깥의 공적 담론으로 진입하였고, 이후 향토지·언론·대중 서술에서 '유일한 세종 필적'류의 표현으로 증폭되었다. 한편 2005년 이후 필체 비교가 가능해지면서 공적 기관의 해제는 '모사'로 수렴하였다. 1978~1979년 화수회장 희승 찬의 유허비 건립은 분단으로 첨소가 불가능해진 묘소를 대신하는 의례 처소를 만들며 전승을 금석문으로 재고정한 국면이고, 1990년 『경수집』 국역본의 간행과 1999년 종합 씨족사 『전의예안이씨천년사』의 간행은 한문 문헌 중심의 전승을 국문으로 집성·전환한 결절점인데86, 이 국면에서 행록의 한문 전문이 국역과 함께 문중 공간에 재공급되는 동시에, 임종 문병설과 '어제어필'이라는 종전 문헌에서 확인되지 않던 요소가 공식 서술에 편입되는 정리와 증폭의 병행이 관찰된다(Ⅲ장 6절). 2022년 문중 구성원에 의한 승정원일기 기사의 확인과 그 결과의 문중 문서화(「우리 가훈의 내력」)는, 1937년과 평행하는 '공적 기록에 의한 전승 확인'의 반복으로서 이 단계의 최신 국면이다. 동시에 '어제어필'이라는 표현의 부가에서 보듯 전승의 정리와 증폭이 병행되는 양상도 확인된다. 즉 근대 이후는 전승을 확산·강화하는 동시에 검증의 계기를 제공해 온 이중적 국면이다.

Ⅻ. 역사적 평가

사료 비판의 결과가 이 가훈의 가치를 훼손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첫째, 전승의 핵인 세종의 이례적 포장은 관찬 사료로 확고히 확인되는 사실이다. 둘째, 여덟 자의 내용 자체(충효의 가전과 인경의 세수)는 그 필자가 누구이든 조선 유교 윤리의 정수를 담은 가훈으로서 5세기 가까이 실제로 가문의 규범으로 기능해 왔으며, 다른 가문에서도 차용할 만큼 보편적 가치를 인정받았다.87 셋째, 갑술보 편찬자들이 전거를 명시하며 판단 과정을 남긴 것(1754), 그리고 문중 구성원이 관찬 기록을 직접 찾아 확인한 것(2022)은 각각 18세기와 21세기 문중 지성의 고증 태도를 보여주는 것으로, 오늘의 검증 작업 역시 그 연장선에 있다. 넷째, 다만 어느 시대의 정리든 '기록의 진정성'과 '진술의 사실성'의 구분이라는 사료학의 원칙 위에서 이루어질 때 가장 단단해진다. 승정원일기 기사의 진정성은 확실하되, 그것이 입증하는 것은 1722년의 진술이지 1432년의 사건이 아니라는 구분이 그것이다.

동시에, 공적·학술적 서술에서는 다음의 구분이 유지되어야 한다. '세종이 이정간의 효행을 포창하여 궤장을 하사하였다'(확인되는 사실), '문중은 족보 권두의 여덟 자를 세종의 어필로 전승해 왔으며, 그 명문화는 현재까지 확인되는 범위에서 16세기 후반으로 소급된다'(후대 기록·전승), '현전 모사본이 세종 친필인지는 확인되지 않았고, 공적 기관은 모사로 본다'(학계 견해). 이 세 문장은 상충하지 않으며, 함께 서술될 때 비로소 정확하다.

ⅩⅢ. 결론

본 연구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1. 1432년 세종의 특진·궤장 하사·효행 포창 교서는 『세종실록』으로 확인되는 역사적 사실이다. 같은 실록의 교서·사은 전문과 세종 21년(1439) 9월 27일 졸기, 「정대부인김씨묘표」(1445), 1456년 신도비문 — 7차 개정에서 한문 전문(서·계보·명 전 범위)을 판독하여 여덟 자 부재를 확증하였다 — 그리고 확인된 범위의 『경수집』 하시에서 어필 하사는 현재까지 확인되지 않는다.

2. 여덟 자의 세종 귀속을 명문화한 현재까지 확인되는 최초의 기록은 1574년 만력보의 삼조설 내지 그 뒤에 부기된 청강공의 수서이다(원본 미확인, 잠정). 여덟 자 자체는 그 이전의 '구보' 권두에 필적의 유래 표기 없이 실려 있었다는 것이 1754년 갑술보 발문(본고에서 한문 원문 확보)의 증언이며, 그 구보의 동정은 미해결 과제이다.

3. 어필 전승은 『승정원일기』 경종 2년(1722) 7월 18일 기사에 수록된 청주 유생들의 사액 청원 상소를 통해 관찬 기록에 처음 등장함이 확인된다. 이 기록은 '어필' 용어와 여덟 자 전문을 담은 현재까지 확인되는 최초이자 — 원문 기준으로 — 유일한 전근대 '御筆' 용례이다. 갑술보 발문 원문(1754)의 용어는 수서(手書)·특사(特賜)이며, 발문의 '어필' 표현은 현대 국역의 보충으로 확인되었다. 반면 조정이 주체가 된 유일한 관련 기사인 영조 49년(1773) 4월 3일 기사(이정간 10대손 이징성에 대한 궤장 하사)는 어필을 언급하지 않아, 조정의 공식 서사가 궤장 중심이었음을 보여 준다. 어필 이해는 갑술보(1754)에서 모사 수록으로 문중 차원에서 공식화되었고, 1937년의 확인·보도로 대중화되었으며, 1990년 『경수집』 국역본 간행사와 1999년 『천년사』를 거쳐 2022년 문중 구성원에 의한 승정원일기 기사의 재확인과 문중 문서화(「우리 가훈의 내력」)로 이어졌다. '어제어필' 표현은 종전 판단을 수정하여 늦어도 1999년 『천년사』 본문으로 소급됨이 확인되었다. 현재 국가의 공인은 없고 공적 기관의 해제는 현전본을 모사로 본다.

3-1. 6차 개정의 핵심 성과로, 갑술보 발문이 인용한 『서원행록』의 한문 전문이 『천년사』 573~576면 수록 전사로 확보되어 전거 사슬이 확증되었다. 발문의 인용구 "世宗大王手書賜家傳忠孝世守仁敬八字"는 행록 문면에 그대로 실재하고, 행록의 용어는 '어필'이 아닌 '수서(手書)'이며, 행록은 실록 수록 교서의 고사(崔鄲·徐積, 唐宣宗·宋仁宗)를 정확히 반영하는 문헌적 기록으로서 그 성립은 『경수집』 초간(1509)과 갑술보 발문(1754) 사이로 확정되었다. 아울러 『천년사』(1999) 본문에는 1432년 포장 국면설(행록·간행사 계열)과 1439년 임종 하사설(인용 문집 계열, '친제어필')이라는 두 서사가 병존함이 확인되어, 임종설의 전거 문헌 동정이 신규 과제로 추가되었다.

3-2. 7차 개정의 핵심 성과는 둘이다. 첫째, 신도비문 한문 전문의 판독으로 15세기 근접 사료의 침묵이 발췌 차원에서 전문 차원으로 확증되었고, 여기에 졸기(1439)와 묘표(1445)가 15세기 사료군에 추가되어 당대 기록의 검토 범위가 사실상 완결되었다. 둘째, 임종설·'친제어필'의 전거 문헌이 『농수집(聾叟集)』으로 서명 확정되었다. 다만 이 서명의 문집은 공개 데이터베이스에서 동정되지 않아, 그 실물 확인이 어필 전승 후반부(임종설 계열)의 성립 연대를 좌우하는 최우선 과제로 남는다. 아울러 유허비명(1978 찬·1979 건립, 화수회장 희승)이 제1서사·수서 계열의 근현대 금석문으로 새로 자리매김되었다.

3-3. 8차 개정의 핵심 성과는 구성의 재편이다. 첫째, 『천년사』의 편찬 과정을 독립 장(Ⅴ장)으로 분석하여 편찬 조직 — 발행인·간행위원장· 편집위원장·파별 집필자·심의·전문 감수 — 을 간행사 문면으로 복원하고, 발행인과 집필자가 동일 개념이 아님을 명제로 확정하였으며, 편찬 관계자의 역할을 항목별 확인/미확인으로 표준화하였다. 임종설과 '어제어필'은 『천년사』 단계에서 비로소 확인되는 서술 요소이나, '최초로 확인된다'와 '최초로 만들었다'는 다른 명제이므로, 인용 문헌 『농수집』의 동정 전까지 그 창안의 주체와 시점은 특정하지 않는다. 둘째, 수용사 장(Ⅵ장)을 신설하여 여덟 자가 족보 권두 → 서원 → 관찬 등재 → 근대 보도 → 금석문 → 국역 간행물 → 공공 조형물 → 종합 씨족사 → 문중 게시 문서로 매체를 확장하며 대표 가훈으로 정착해 간 과정을 연대순으로 재구성하였고, 현판·병풍·족자·의례 문서·교육자료 등 미조사 매체의 실사 설계를 제시하였다.

3-4. 9차 개정의 핵심 성과는 『천년사』 권말 부속문의 실물 확보다. 1133면 편찬 명단으로 조직의 전모(심의위원장·총정리 및 편집·교정·편별 집필자·자료제출자)가 확정되었고, 특히 이종관이 발행인·전문 감수에 더해 제1편과 제6편 선부전서공파문중사의 집필자로 명기되어 있음이 확인되어, 임종설·'어제어필' 지면의 집필 귀속 범위가 '대표집필 태호·집필 종관'으로 좁혀졌다. 1134~1135면 편집후기는 주필(이태호)의 집필 기간(1998. 11. 1~1999. 6. 1)과 함께 과장·허위 미화 요구를 삭제하였다는 편집 원칙을 명시하여, 최종 문면에 편집 필터가 개재하였음을 1차 증언으로 확정하였다. 판권지로는 초간(1999. 6. 1)과 증보판(2002. 4. 30)의 판본 이력이 확정되어, 인용 지면의 판본 귀속 대조가 신규 과제로 추가되었다. 이 확장에도 불구하고, 집필 귀속의 '범위' 확정과 서술의 '발생' 규명은 별개라는 유보 — 분담 경계 미확정, 『농수집』 명시 인용, 편집 층위의 개재 — 는 그대로 유지된다.

3-5. 10차 개정은 새 사실의 추가가 아니라 종합의 방식을 보강한 것이다. Ⅲ~Ⅵ장의 개별 검토를 사본 계통학의 원리로 재배치한 전승 계통도(Ⅶ장)를 신설하여, 확증된 인용 관계(행록 ⇒ 갑술보 발문)와 개연 추정(행록과 1722년 상소의 병렬), 원문 확인과 보고상 잠정을 구분한 계보를 복원하였고, 문헌별 전승 요소 대조표와 요소별 최초 등장 연표로 이를 검증 가능하게 만들었다. 아울러 ’사료의 침묵’의 방법론적 지위를 명시하여, 15세기 사료의 침묵이 단정의 근거가 아닌 역사적 정황의 지위에 있음을 확정하였다. 계통도는 원본 미확인 문헌의 동정에 따라 해당 마디를 교체하면 되는 열린 구조이므로, 본고의 후속 과제들은 모두 이 틀 안에서 수행될 수 있다.

4. 『승정원일기』는 세종대분이 현존하지 않아 당대 기록의 부재가 구조적으로 확정되어 있다. 검색어 '李貞幹'에 의한 전수 검색은 완료되어 관련 기사가 2건(1722, 1773)으로 확정되었으며, 보조 검색어('松泉', '賜額', '孝靖' 등)에 의한 추가 검색, 1722년 상소에 대한 예조의 후속 처리(사액 시행 여부·시점)의 추적, 그리고 상소 자술과 해제류 사이의 서원 연혁 불일치의 해소가 후속 과제이다.

5. 이종관은 『전의예안이씨천년사』(1999)에 의해 이종관(李鍾寬), 당시 화수회 회장으로서 동서의 발행인·머리말 저자·전문 감수자로 동정이 확정되었고, 6차 개정에서 1990년 『경수집』 국역본 간행사의 저자(효정공 19대손, 당시 전서공파종회장), 화수회 이사장 재임, 그리고 『천년사』 제6편 오창문중 정착사 부분의 정리자임이 추가로 확정되었으며, 9차 개정에서 1133면 명단과 판권지에 의해 제1편의 집필자이자 제6편 선부전서공파문중사의 '집필'(대표집필 태호와 병기), 그리고 판권지상 발행인임이 추가로 확정되었다. 개별 절·문장의 작성자로 단정하지 않는 원칙은 유지하되, 그가 1990년 이래 가훈 관련 서사의 공식 문서화에 직접 관여해 온 사실이 1차 문면으로 입증되었다. 판사 경력·생몰년은 여전히 확인되지 않았다. 명단상 '총정리 및 편집'은 태호, '교정'은 태세로 각각 명기되어 있고 이종관은 두 항목에 명기되어 있지 않으며, 편찬 회의 참석 여부와 회의록의 존부는 현재까지 확인되지 않는다. 이는 편찬 과정 기록의 확보로만 판정될 수 있다(Ⅴ장 4절). 감수와 편집, 발행과 집필은 각각 별개의 역할이므로 서로 다른 전거로 입증되어야 하고, 한 사람이 복수의 역할을 겸한 경우(이종관의 발행인·감수자·집필자 겸임)에도 각 역할은 개별 전거로 확인된 범위에서만 서술된다.

6. 최종적으로, 현재 확인 가능한 사료의 범위 안에서 가장 객관적인 서술은 다음과 같다. 세종의 포장은 사실로 확인되고, 어필의 전승은 늦어도 16세기 후반부터 문헌으로 확인되며, 어필 하사 자체의 사실 여부는 현재까지 확인도 부정도 되지 않는다. 이 서술은 어느 한쪽을 지지하지 않으면서 논쟁의 여지를 사료의 경계선 위에 고정시킨다. 남은 것은 만력보·숭정보 원본과 갑술보 실물, 『경수집』 원간본 계통, 신도비 비석 실물·탁본(전문 문면은 확보됨), 『서원행록』의 서원 소장 원본, 『농수집(聾叟集)』(임종설·'친제어필'의 전거)의 실물 동정, 승정원일기 후기분(松泉·賜額· 孝靖 보조 검색), 『천년사』 발간사(권말 명단·편집후기· 판권지는 9차 개정에서 확보)와 화수회 회의록 등 편찬 과정 기록, 초간본(1999)과 증보판(2002)의 판본 대조, 현판·병풍·족자·의례 문서·교육자료 등 수용 매체의 실사, 뿌리공원 조형물의 설치 연대, 그리고 근대 편찬 관련 원자료의 확인이라는, 문헌과 실사로 답할 수 있는 과제들뿐이다.

ⅩⅣ. 연구의 의의와 최종 원칙

1. 이 연구가 판정하지 않는 것

본 연구는 세종이 여덟 자를 실제로 썼는지, 쓰지 않았는지를 판단하는 연구가 아니다. 그 물음에 답할 수 있는 사료는 현재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하지 않는 사료를 대신하여 판정을 내리는 것은 연구가 아니라 믿음의 표명이다. 본 연구가 복원한 것은 사건이 아니라 기록이다. 곧 한 문장이 약 600년 동안 어떻게 기록되고, 인용되고, 전승되고, 재해석되어 왔는지를 사료학적으로 복원한 연구이다.

2. 이 연구가 지향한 가치

본 연구가 독자에게 제공하고자 한 것은 결론이 아니라 검증 가능한 틀이다. 그 지향을 네 가지로 요약한다.

첫째, 특정 결론을 유도하지 않는다. 어필 하사설의 옹호도 부정도 본고의 목적이 아니며, 모든 판정은 '확인된다 / 전승된다 / 추정된다 / 현재까지 확인되지 않는다'의 네 층위 안에서만 이루어졌다.

둘째, 사료를 작성 시점 순으로 배열하여 전승의 형성 과정을 복원하였다. 개별 문헌에 대한 언급은 종전에도 있었으나, 15세기 당대 사료로부터 현대 문중 자료에 이르는 전체 계보를 원문 확인 기준으로 배열하고 그 계통도를 복원한 것은 본고가 시도한 새로운 작업이다.

셋째, 결론보다 사료 자체를 중심에 두었다. 부록의 원문·번역, 본문의 대조표와 계통도는 독자가 필자의 판정을 거치지 않고 사료에 직접 접근하여 스스로 검증할 수 있도록 배치되었다.

넷째, 열린 연구로 설계되었다. 만력보 원본, 숭정보 원본, 서원 소장 행록 원본, 『농수집』 실물이 발견되는 경우 본고의 계통도와 대조표는 해당 마디를 교체·보완하는 방식으로 언제든지 수정될 수 있으며, 후속 연구자는 동일한 틀 안에서 검증과 보완을 이어갈 수 있다.

3. 최종 원칙

본 연구를 관통하는 원칙은 한 문장으로 요약된다.

역사는 믿음으로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사료로 복원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본고의 모든 결론은 원문 사료와 각주로 입증하였고, 입증되지 않는 내용은 예외 없이 '현재까지 확인되지 않는다'로 서술하였다. 이 원칙은 여덟 자의 역사적 가치를 훼손하지 않는다. 오히려 세종의 이례적 포장이라는 확인된 사실 위에, 여섯 세기에 걸쳐 한 가문과 한 지역 사회가 그 기억을 보존하고 문서화하고 재해석해 온 전승의 역사 전체를 — 그 자체로 하나의 문화사적 자산으로 — 온전히 드러내는 길이다.

4. 열린 연구 선언

본 연구는 현재까지 확보된 사료를 바탕으로 작성된 중간 연구 성과이다. 향후 회의록, 내부 문서, 편집 자료, 서신, 사진, 영상, 녹취, 공문서 등 새로운 1차 사료가 확인될 경우 기존의 분석과 결론은 언제든지 수정·보완될 수 있다. 이는 본 연구의 한계가 아니라 역사학의 기본 원칙이며, 사료에 따라 연구를 지속적으로 갱신하는 열린 연구(Open Historical Research)의 방법론을 따른다. 본고의 어떠한 서술도 특정인의 책임을 단정하거나 분쟁의 결론을 제시하기 위한 것이 아니며, 모든 결론은 언제나 사료가 입증하는 범위 안에서만 제시한다.

참고문헌

1차 사료 및 관찬 자료

『세종실록』 권56, 세종 14년(1432) 4월 25일; 세종 14년 5월 3일; 권86, 세종 21년(1439) 9월 27일(이정간 졸기).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DB (sillok.history.go.kr).

『승정원일기』 542책(탈초본 29책), 경종 2년(1722) 7월 18일 기사(충청도 청주 유학 박수함 등 상소); 영조 49년(1773) 4월 3일 기사. 국사편찬위원회 승정원일기 DB (sjw.history.go.kr). ※ 세종대분 부전. 검색어 '李貞幹' 전수 검색 완료(부록 5), 보조 검색어 추가 검색 필요.

족보·문중·서원 문헌 (원본 확인 필요)

전의이씨 성화초보(1476, 이하 작성, 원본 부전).

전의이씨 만력보(1574 편찬, 서발 1575). 정숙공 탁·약포공 해수·청강공 제신 주관, 안로 협력(부정공파 연혁). 권수 「삼조설」(이제신). 목판본 단권, 現無傳(부정공파 연혁). 갑술보 수권 전재 서발문(만력구보서·발)으로 간접 확인 가능.

전의이씨 숭정보(1634). 구준·명준 형제 및 영천군수 이후기 주관, 목판본 전 2권, 현전 최고본으로 극희귀(부정공파 연혁). 실물 소재 확인이 최우선 실사 과제.

전의이씨 갑술보(1754) 이징국 발문. 발문 한문 원문은 문중 전사본으로 확보. 실물 추정본: 『전의이씨족보』 목활자본 10권 10책, 이덕용 등 편,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청구기호 K2-1782), 디지털장서각(jsg.aks.ac.kr) 원문이미지 공개. 활자(문중 연혁: 금속활자 / 장서각 서지: 목활자) 불일치는 실사로 판정 필요. 전사본과 실물의 대조는 미완.

「효정공 송천서원 행록」(성립 1509~1754년 사이). 한문 전문·국역: 『전의예안이씨천년사』 575~576면 수록 전사. 서원 소장 원본은 실사 필요.

「우리 가훈의 내력」, 전의·예안이씨화수회본부 보관(작성 연대 미상, 2022년 10월 이후 현재 형태 성립).

「족보 간행 내역」, 전의이씨부정공파종문회 홈페이지(www.jlbj.net), 2026. 7. 15 열람. ※ 성화초보(1476)부터 경오대동보(1990)까지 17종의 간행 연혁. 문면상 경오대동보(1990) 권수 세적편 계통의 전재로 추정되나 원전 대조 미완. 화면 캡처 보존본 확보(2026. 7. 15 20:05~20:06, 6매, 별도 PDF 편철). 본고에서는 5급(근대 이후 문중 편찬물) 자료로 취급.

「해명요구서」, 이종관 작성·이용호 수신, 2023(일자 미기입), 사본 14면. ※ 호소문 7개 항 전재 및 별지(만력보 발문 한문 구절) 포함. 개인 문서이므로 보존 사본에서 개인정보(주민등록번호 등) 마스킹 필요.

이용호, 「호소문 --- 전의이씨 시조 태사공 정체성 확립을 위한 탄원서」, 2023. 1. 11 작성(2023. 2. 6 발송), 총 8개 항, 원본 사진본 확보. 서명 "전의이씨 대사성공파 종회 30세 용호".

이용호, 「청원서 --- 太師公의 정체성을 회복하라」, 2023. 1. 11, 원본 사진본 확보. ※ 별지로 만력보 발문(1574)·경오보 권수와 서문(1990) 첨부 명기 --- 별지 실물의 확보가 만력보 발문 전문 확인의 경로가 된다.

「萬曆譜跋」(안로, 만력 3년·1575년 3월 하한), 『전의·예안이씨성보』 제1권 수권 전재본의 사본 --- 이용호 청원서 별지 <2>로 확보. ※ 쟁점 구절 "首冠家訓尊世守也" 판독 확정의 근거. 전재 충실성은 장서각본 대조로 최종 확정 예정.

이용호(추정), 「종사소고(宗事小考)」 수기 연혁 메모, 작성 연대 미상, 사진본. ※ "一石 熙昇 회장" 표기 --- 이희승 동일인 확정의 근거. 「참고문헌 수기 목록」·「한한대전 次자 고증 메모」·「별지 <1> 계보도」 동봉.

『전의인의 역사와 빛』(전의이씨 석탄공파 은와공종중 종중사), 전의이씨은와공종중, 2011. ※ 12면에 이용호 격려사(2011. 1) 수록 --- 여덟 자를 전의이씨 가전으로 찬양한 문면. (만력보 사진의 수록처는 이 책이 아님 --- 실물 대조 확인.)

『경원록(景遠錄)』, 전의·예안이씨화수회본부, 1990년대 중반 간. 「영사재 묘당호 제정 시말기」(179~180면), 「각급위원회 위원록」(226면) 확보(사진본).

『전의예안이씨천년사』, 전의예안이씨화수회본부, 초간 1999. 6. 1, 증보판 2002. 4. 30. (판권지: 발행인 이종관, 편집인 이대선, 상무이사 이상호, 편찬 이태호; 권말 명단: 간행위원장 이대선, 편집위원장 이용호, 총정리 및 편집 이태호, 교정 이태세) ※ 본고 6차 개정은 제6편 550~579면, 7차 개정은 제7편 860~865면 및 제6편 572면 재판독본, 9차 개정은 권말 1133~1135면(편찬 명단·편집후기)과 판권지의 실물 지면을 분석에 사용. 확보 지면의 판권지는 증보판 발행 사항을 포함하므로 증보판 계열로 판단; 초간본과의 판본 대조는 미완.

『경수집(慶壽集)』. 초간 1509(중종 4), 재간 1682(숙종 8), 3간 1918, 국역 4간 1990(간행사: 전서공파종회장 이종관). 원간본 계통의 현전 여부 미확인.

이정간 신도비(1456, 찬 이서장). 「효정공휘정간신도비명병서」 한문 전문·국역: 『전의예안이씨천년사』 제7편 860~864면 수록 전사(7차 개정에서 판독). 비석 실물·탁본 대조 필요.

「정대부인김씨묘표」(1445, 찬 이양간). 원문·역문: 『전의예안이씨천년사』 제7편 860면 수록 전사.

「효정공휘정간유허비명」(1978 찬·1979 건립, 찬 화수회장 희승). 『전의예안이씨천년사』 제7편 864~865면 수록 전사.

『농수집(聾叟集)』. 『천년사』 572면이 임종 문병·'친제어필' 서사의 전거로 인용한 문집. 서명은 7차 개정에서 판독 확정, 실물·저자·성립 연대 미확인(공개 DB 미동정).

연구·해제·보도

「가전충효 세수인경」·「전의이씨」,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디지털구로문화대전 (GC03000379, GC03000386), 한국학중앙연구원.

「송천서원」·「승정원일기」·「전의이씨 족보」·「전성세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0031087, E0032244, E0049592, E0049489), 한국학중앙연구원.

이상주, 「가전충효 세수인경은 세종의 친필일까」(2024. 8. 27.); 「전의이씨 가훈이 세종친필로 알려지는 과정」(2024. 11. 5.), 세종대왕신문.

「전의이씨족보」 해제, 한국학중앙연구원 디지털장서각 (JSG_K2-1782).

천혜봉, 『'세종대왕 어사 희우정 효령대군 방문'과 '효령대군 친필 전문'에 대한 고찰』, 고산재, 2005.

『한글』 5, 한글학회, 1937; 「세종대왕 어필 발견」, 동아일보, 1937.

「해군 1호 잠수함 이천함, 세종이 가훈 써줘」, 디트뉴스24, 2011. 10. 23. (대전 중구 뿌리공원 전의이씨 조형물 「인경」의 전면 작품 설명과 후면 유래문 전재).

부록

부록 1. 원문 사료 확인 경로

저작권 및 원본 대조 원칙에 따라, 본고는 관찬 사료의 현대 국역 전문을 전재하지 않고 확인 경로를 제시한다. (1) 세종실록 세종 14년 4월 25일 교서 원문(한문)·국역: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DB에서 '세종 14년 4월 25일'로 검색. (2) 같은 해 5월 3일 이정간 사은 전문: 동일 DB. (3) 승정원일기 경종 2년 7월 18일 기사: 본고에서 원문을 확인하였으며 핵심 대목은 부록 4에 수록. 후속 처리 기사는 승정원일기 DB에서 '李貞幹', '松泉', '賜額'으로 추가 검색. (4) 만력보·갑술보: 국립중앙도서관·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규장각 소장 전의이씨 족보 판본 실사. (5) 서원행록: 송천서원(청주) 및 관련 문중 소장 자료 실사.

부록 2. 미확인 사항 목록 (후속 검증 과제)

번호 미확인 사항 검증 방법
1 갑술보 발문이 말하는 '구보'의 판본 동정 및 발문 전사본의 원본(갑술보 실물) 대조 만력보·숭정보·갑술보 원본의 권두 실사
2 만력보(1574) 원본의 현전 여부, 삼조설 본문과 그 뒤의 청강공 수서의 구분 확인 장서각·규장각·국중도·문중 소장본 조사
3 『서원행록』의 정확한 성립 시점(확정 구간 1509~1754 내)과 해당 대목의 전거, 서원 소장 원본의 현전 여부 (문면은 6차 개정에서 확보) 송천서원·문중 소장 원본 실사, 가장·행장류와의 문면 대조 ※ 문면 자체는 천년사 575~576면 전사로 확보됨
4 『경수집』 원간본 계통의 현전 여부 (간행 이력은 국역본 간행사로 확정) 고서 목록·문중 소장 조사 ※ 판본별 추록 부분의 판별
4-1 『농수집(聾叟集)』(임종설·'친제어필'의 전거; 서명은 7차 개정에서 판독 확정)의 실물 동정 문중·서원 소장 문집류 실사, 고서 목록 조사 — '어제어필'·임종설의 성립 연대를 좌우하는 최우선 과제
5 신도비문(1456) 전문의 어필 언급 유무 — 7차 개정에서 전문 판독으로 부재 확증(완료) 비석 실물·탁본과의 최종 대조만 남음
6 1722년 상소에 대한 예조의 후속 처리와 사액 시행 여부·시점(해제류의 1711년설과 상소 자술의 불일치) 경종~영조대 실록·승정원일기 검색(松泉, 賜額 등)
7 1722년 상소의 이정간 대목과 서원행록의 선후·의존 관계(문면 대조는 6차 개정에서 수행 — 공통 요소와 용어 차이 확인) 행록의 정밀한 성립 시점 확정(과제 3)에 종속. 공통 요소·용어 차이는 확인됨
8 이종관(李鍾寬)의 생몰년·판사 경력·족보 편찬 참여(동정은 확정됨) 법조 인명록·관보·대동보 서발문·화수회 회의록
9 현전 모사본의 서지·필체·지질 분석 서지학·과학적 분석 의뢰
10 근대 이후 판본별 서술 변화('어제어필' 등 표현 부가 시점 포함) 대동보 각 판본·문중 문서 문면 대조
11 「우리 가훈의 내력」의 작성 연대·작성 주체·개정 이력 화수회본부 기록 조사
12 『천년사』 권두·권말 부속문의 확보 — 편찬 명단·편집후기·판권지· 발간사 일부 해소(9차): 편찬 명단 1133면, 편집후기 1134~1135면, 판권지 확보. 발간사만 잔여
13 『천년사』 편찬 회의록·파별 제출 원고의 현전 여부 화수회 기록·문중 소장 자료 조사
14 수용 매체(현판·병풍·족자, 묘제 홀기·축문, 교육자료·회보)의 실물과 사용 연대 송천서원·화수회본부·종가 실사 및 목록화
15 뿌리공원 전의이씨 조형물의 설치 연대와 유래문 전문 관리 기관 기록 조회, 현장 실사(보도 전재와 대조)
16 『천년사』 초간본(1999)과 증보판(2002)의 판본 대조 양 판본 실물 대조(인용 지면의 판본 귀속·문면 이동 확인)

부록 3. 사료 등급표

등급 해당 사료 성격
1급 세종실록(1432 기사) 당대 사초 기반 관찬 사료
2급 신도비(1456, 발췌 원문 확인), 경수집(초간 1509, 현전은 후대 판본) 사건 근접 시기의 금석문·시문. 신도비는 전문 대조 필요, 경수집은 추록·일실·보충의 판본 층위 비판 필요
3급 승정원일기 1722년 기사; 삼조설(1574)·갑술보 발문(1754) 작성 시점이 확인되는 후대 기록. 단 1722년 기사는 형식상 관찬이나 내용상 유림 전승의 인용
4급 서원행록(성립 1509~1754년 사이, 문면 확보) 성립 구간이 확정되고 문면이 확보된 문중·서원 기록. 정밀 성립 시점과 전거는 불명확
5급 근대 보도·향토지·개설서; 『전의예안이씨천년사』(1999); 현대 문중 기록(「우리 가훈의 내력」) 2차 서술·전승의 현대적 집성. 단, 공적 기관 해제는 학계 견해를, 천년사의 문헌록(신도비명 등 원문 수록)과 문중 기록의 발견 경위 부기(2022)는 각각 자료집·전승사 사료로서의 가치를 가짐

부록 4. 『승정원일기』 관련 기사 원문·번역

(1) 경종 2년(1722) 7월 18일 — 청주 유생 사액 청원 상소 중 이정간 대목

충청도 청주 유학 박수함(朴守諴) 등이 7현 사우의 사액과 이제신·최석정·이인혁의 추배를 청한 상소 중 이정간 관련 대목이다. 상소에서 이정간은 "觀察使贈諡孝靖公臣李貞幹"으로 지칭된다.88

[원문] 李貞幹, 自幼有至性, 其父早死, 事母極孝, 老而不衰, 嘗慕老萊子斑衣娛親之意, 爲嬰兒戲, 以悅母志, 世宗聞而嘉之, 擢拜中樞院使, 遂以御筆, 書家傳忠孝世守仁敬八大字, 以褒之。又令賜宴壽親, 州人至今艶稱之。

[번역] 이정간은 어려서부터 지극한 성품이 있었다.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나자 어머니를 지극한 효성으로 섬겨 늙어서도 변함이 없었고, 일찍이 노래자가 색동옷으로 어버이를 즐겁게 한 뜻을 사모하여 어린아이 놀이를 하며 어머니의 마음을 기쁘게 하였다. 세종께서 이를 들으시고 가상히 여겨 중추원사에 발탁하시고, 마침내 어필로 '가전충효 세수인경' 여덟 큰 글자를 써서 포창하셨다. 또 잔치를 내려 어머니의 장수를 축하하게 하시니, 고을 사람들이 지금까지 아름답게 일컫는다. (필자 번역)

[비답 원문] 省疏具悉。疏辭令廟堂該曹, 稟處。

[비답 번역] 상소를 살펴 잘 알았다. 상소의 내용은 묘당과 해당 관서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라. (필자 번역. 해당 상소는 예조에 계하됨)

(2) 영조 49년(1773) 4월 3일 — 이정간 10대손 이징성 소견·궤장 하사 (발췌)

[원문] 前五衛將李徵聖, 與魚必溟同召, 今日見焉, 以賜几杖。李貞幹十代孫, 戊申亦入原從功臣, 年今八十三, 筋力尙强, 況武臣? 令該曹, 知中樞加設單付, 以表辛勤召見之意。

[번역] 전 오위장 이징성을 어필명과 함께 불러 오늘 만나 보고 궤장을 하사하였다. (이징성은) 이정간의 10대손으로 무신년(1728)에 원종공신에도 들었으며, 나이가 이제 여든셋인데 근력이 아직 강건하니 하물며 무신임에랴. 해조로 하여금 지중추부사 가설 단부(單付)로 임명하게 하여, 노고를 아끼지 않은 이를 불러 만난 뜻을 표하도록 하라. (필자 번역, 발췌문)

서지: 『승정원일기』 542책(탈초본 29책) 경종 2년 7월 18일 신축; 영조 49년 4월 3일. 원문은 조선시대 문헌으로 저작권 보호 대상이 아니며, 번역은 필자가 새로 작성한 것이다. (2)는 발췌문으로, 전후 문맥의 확인이 필요하다.

(3) 갑술보(1754) 이징국 발문 (문중 전사본 기준)

원문·번역 전문은 Ⅲ장 3절 라항에 수록하였다. 전사본의 교감 사항: 開卷껜見 → 開卷即見(한글 혼입 오전사). 역주 사항: 聖朝(국역본의 '聖祖' 병기는 오기), 世廟(문맥상 세종, 단 조선 문헌에서 世祖 지칭 용례가 많아 역주 필요), 원문에 御筆 표현 없음(手書·特賜로만 표현). 갑술보 실물과의 대조가 후속 과제이다.89

(4) 「효정공 송천서원 행록」 (『천년사』 575~576면 수록 전사 기준)

원문·번역은 Ⅲ장 4절 나항에 수록하였다. 서지·교감 사항: ① 『천년사』 지면은 한문 전문에 대두(擡頭)의 공격(空格)을 보존하고 있다(世宗大王· 典敎·賜·命 앞). ② 판독 문제: 晚承'震'獎은 문맥상 宸獎(임금의 장려)의 오식으로 판단, 崔'郾'은 실록 교서 원문의 崔鄲과 대조할 때 자형 유사에 의한 오기 내지 이표기, 銀杏樹可'菱'은 可蔭의 오식으로 판단하되 모두 원문 표기를 병기하였다. ③ '太師公十一代孫'은 세계 산정상 10대손(11세) 의 착오로 보이며 『천년사』 국역자도 주기하였다. ④ 서원 소장 원본과의 대조가 후속 과제이다.90

(5) 이정간 신도비문 (『천년사』 제7편 860~861면 한문 전문 기준)

세종 포장 대목의 원문·번역은 Ⅲ장 1절 라항에 수록하였다(『천년사』 570면 발췌와 문면 일치).91 7차 개정에서 제7편 860~861면의 한문 전문(「효정공휘정간신도비명병서」)과 861~864면 국역을 확보하여 서·계보·명의 전 범위를 판독하였고, 여덟 자·어필·수서에 해당하는 언급이 없음을 확증하였다. 서지·교감 사항: ① 찬술 연대는 경태 7년 병자(1456)이며, 국역 말미의 '경태 7년 병자(1458)년'은 서기 환산의 착오이다. ② 한문면 말미의 찬자 직함 '嘉善大司憲府大夫司憲 全城君 恕長'은 '嘉善大夫 司憲府大司憲'의 전사 착란으로 판단된다(국역면은 '가선대부 사헌부대사헌 전성군 서장'으로 바로잡아 옮김). ③ 전문의 완전한 재전사·교감은 지면 해상도의 한계로 비석 실물·탁본 대조와 함께 수행할 후속 과제로 남긴다.

(6) 「정대부인김씨묘표」 (『천년사』 제7편 860면 기준)

정통 10년 을축(1445) 2월 29일, 아들 내섬소윤 이양간 찬. 핵심 대목: "夫人天資淑懿, 秉心淵眞。公先卒, 寡居五十年, 子孫盈門, 皆爲搢紳, 訓之以禮, 撫之以慈, 家之規範, 爲世所慕。" (구두점 필자) 여덟 자·어필 언급 없음. 『천년사』 국역자 주기는 전서공 묘갈문(102세)과 묘표(100세)의 수한 불일치를 지적하고 생년(1342) 기준 100세를 옳다고 판단하였다.

(7) 「효정공휘정간유허비명」 (『천년사』 제7편 864~865면 기준)

기미(1979) 3월 4일 건립, 화수회장 희승(熙昇) 찬(무오년 10월 지). 서지·교감 사항: ① 지면의 간지 병기 '무오(1976)'는 불일치(무오=1978, 병진=1976)이며, 건립 연도(1979)와의 정합상 1978년 찬술로 판단된다. ② 여덟 자 관련 문면: "家傳忠孝 世守仁敬 여덟 字를 친히 써 주시고" — 1432~1434년 포장 국면 배치(제1서사), 수서 계열 표현. ③ 명(銘)은 국문 시조 형식이다. ④ 비문은 분단으로 장단 묘소를 33년간 첨소하지 못하는 사정과 유허비의 의례 대체 기능을 자술한다.92

부록 5. 승정원일기 '李貞幹' 검색 결과 판별표

기사 일자 내용 요지 판별
경종 2년(1722) 7. 18 청주 유생 박수함 등의 7현 사우 사액·추배 청원 상소. 이정간 대목에 어필 진술 관련 (본고 Ⅲ장 2절 가~다)
영조 6년(1730) 5. 26 부제학 이덕수의 상소(선조 보감 찬집 시상 관련) 무관 (이정간 미언급)
영조 12년(1736) 10. 27 명단 중 李榮榦 등 무관 (부분 일치 명단)
영조 12년(1736) 11. 7 팔도 유생 명단 중 李貞榦 무관 (이체자 동명이인, 생존 유생)
영조 49년(1773) 4. 3 이정간 10대손 이징성 소견·궤장 하사·지중추 가설 단부 관련 (본고 Ⅲ장 2절 라)
정조 6년(1782) 11. 2 대규모 인명 명단 중 李貞幹 무관 (동명이인)

판별 기준: 인물의 동일성(자획 대조 포함), 기사 내용의 관련성. 1736년 11월 7일 기사의 인물은 이름 끝 자가 幹이 아닌 榦으로, 상소를 올린 생존 유생이므로 1439년에 졸한 이정간과 동일인일 수 없다. 이 판별표는 검색어 '李貞幹'에 한정된 것이며, 서원명·시호 등으로만 지칭된 기사는 포착하지 못한다.

부록 6. 인물별 문서 대장(이종관·이용호)

[게재 보류] 인물별 문서 대장과 그 영인(자료집)은 진행 중인 절차 관련 실명 문서를 포함하므로 공개판에서는 게재를 보류한다.

판권

가전충효 세수인경의 사료적 기원과 전승 과정 연구

저자: 이춘화(건축사)

판차: 공개판(학술편) --- 16차 개정 원고 기준

최종 편집일: 2026년 8월 6일

본서는 열린 연구(Open Historical Research) 방법론에 따라

새로운 1차 사료가 확인되는 대로 개정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