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1910년 3월, 뤼순 감옥의 한 방에서 서른한 살의 사형수가 책을 쓰고 있었다. 안중근이다. 그는 남은 날을 항소에 쓰지 않았고, 자기를 죽이는 나라를 저주하는 데 쓰지 않았다. 한국과 중국과 일본이 함께 살아갈 길을 적는 데 썼다. 다섯 편을 계획했고, 두 편에서 멈췄다. 나머지 세 편이 놓였어야 할 자리는 그 뒤로 116년 동안 비어 있다.
이 책은 그 빈자리를 대신 채우는 책이 아니다. 지은이는 프롤로그에 이렇게 적었다.
남의 미완을 함부로 완성하는 것은 그 사람을 기리는 일이 아니라 지우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하려는 일은 다릅니다. 그 빈자리를 빈자리인 채로 지키면서, 그 곁에 오늘의 상을 하나 차리는 일입니다.
책은 한반도의 가장 남쪽, 전라남도 장흥의 정남진에서 시작한다. 하늘로 왼손을 든 동상 앞에서 출발해 하얼빈역의 아침을 지나고, 뤼순의 법정과 감옥을 지나고, 그의 제사를 칠십 년 넘게 지내 온 장흥의 작은 사당을 지나, 세종 전의의 칠백 미터 길에 닿는다. 그 길의 들머리에는 6·25가 갈라놓은 한 소녀가 아버지를 기다리며 심은 나무가 서 있다.
지은이는 역사학자가 아니라 건축사다. 그래서 쓰는 법을 먼저 약속한다. 확인한 것은 확인했다고 쓰고, 확인하지 못한 것은 확인하지 못했다고 쓴다. 집안에서 입으로 전해 온 이야기는 전승이라고 밝힌다. 그리고 안중근은 사람을 죽인 사람이라는 사실에서 시작한다.
빈자리는 포기가 아니라 약속입니다.
책을 사는 곳
ISBN 979-11-12-30270-0 · 영어판 On Peace in the East 2026은 아마존에 있다.
차례
- 프롤로그 — 빈자리에서 시작하는 글
- 제1장정남진, 가장 남쪽에서 북쪽을 보다
- 제2장하얼빈의 아침
- 제3장법정에서 국가를 말하다
- 제4장토마스, 신앙과 총 사이
- 제5장총에서 펜으로
- 제6장장흥, 혈연을 넘어선 기억
- 제7장1256년의 물
- 제8장제사가 태어난 자리
- 제9장700미터, 질문하는 길
- 제10장함께 걷고, 함께 앉고, 함께 먹다
- 제11장문을 여는 집안
- 제12장한국인의 존엄에서 인간의 존엄으로
- 제13장AI 시대의 동양평화론
- 제14장한반도, 밥은 먹자
- 제15장다시 한 사람에게, 한 상의 평화
- 에필로그 — 사랑나무 아래에서
- 저자 후기 — 열여덟 해와 열 권의 책
- 부록
- 부록 1안중근 『동양평화론』 서(序) — 새 국역
- 부록 2출간 전 공개 선언 (2026년 8월 19일)
- 부록 3이 책의 연표 — 1256년에서 2026년까지
- 부록 4네모난 고래와 검은 독수리, 그리고 사랑나무 — 어린이를 위한 이야기
- 부록 5함께 밥을 먹자 — 영화적 건축 선언
책은 책으로 끝나지 않는다
프롤로그는 이렇게 맺는다. 2026년 11월 10일, 그 칠백 미터를 실제로 걷는다. 걷고, 산에 올라 제를 올리고, 내려와 한 상에 앉는다. 그날 오지 못한 사람의 자리는 비워 둔다.